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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다서영 May 28. 2023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조금은 긴 이야기(소설)

• 한 직장인의 11월 11일 일상


“디리링, 디리링, 디리링.”

시끄러운 알람 소리가 작은 방안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젠장” 정민은 거칠한 음성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힘겹게 눈을 떴다. 정민의 미간에 깊게 내천자가 새겨진다. 계속해서 울리는 알람 소리에 정민은 휴대폰을 낚아챘다.


오전 6시 50분. 

“십 분만 더.”

정민은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웅얼거리며,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곧바로 눈을 번쩍 떴다. 얼마 전, 팀장이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주 정민 대리, 출근 십 분 전에는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깊은 한숨을 내쉰 정민이 마른세수를 하며, 몸을 일으켰다.

거실로 나온 정민은 바로 TV를 켰다.

때마침 7시 뉴스를 시작한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민은 TV에 귀를 열어둔 채, 냉장고로 향했다. 그리고 어젯밤 넣어뒀던 보리차를 꺼내 물병 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 시원해.’ 식도를 타고 내려오는 짜릿함에 온몸이 부르르 떨려온다.


7시 20분.

정민은 머리카락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물방울을 손으로 휘휘 저어 떨어트리며, 식기대에서 대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대접에 시리얼을 쏟아붓고는, 우유를 따랐다. 시리얼이 우유에 젖어들어서 잠시 눅눅해질 때까지 기다린 후에 먹기 시작했다. ‘와그작, 와그작.’ 기계적인 입 놀림에 시리얼이 씹혀갔다. 한 참을 윗니와 아랫니를 맞물리고 있는데, ‘띠링’ 문자 오는 소리가 들렸다. 확인해 보니, 저녁 약속 시간을 묻는 친구의 문자였다. ‘응, 오늘 저녁 7시, 이따 봐. ’ 친구에게 답장을 보낸 정민이 다시 대접으로 시선을 내렸다. 몇 개 남은 시리얼이 우유에 둥둥 떠 있는 게 보였다. 정민은 시리얼이 잠겨 있는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7시 30분.

정민은 잠들기 전에 생각해 뒀던 옷을 꺼내 입고, 거울에 섰다. 그리고 왁스를 집어 들고는, 머리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꾹꾹 눌러도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올라온다. 파마를 다시 해야 하나? 파마한 지 아직 한 달도 안 지난 거 같은데. 정민은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짜증이 났다. 흘끗 시계를 보니 7시 40분이었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출근 10분 전까지 도착할 수 없었다. 촉박한 시간 때문에 서둘러 밖으로 나오는 정민의 표정이 불퉁하다.


7시 55분.

버스 정류장 앞,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버스가 도착했다. 역시나 버스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정민은 앞문으로는 도저히 탈 수가 없어서, 뒷문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어찌어찌 버스 안에 자리를 잡은 정민이 이어폰을 꺼내기 위해 가방을 뒤적였다. 그 순간, "아, 진짜."라며 짜증이 살짝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눈동자만 데구루루 굴려보는데 바로 앞에 서 있는 여자가 흘끔거리는 것이 보였다. '지금 나를 치한 취급하는 거야?' 정민은 어이가 없었다. 정민은 재빠르게 이어폰을 꺼내서 귀에 꽂고는 양손을 살짝 위로 올렸다. 움직임을 멈추자 여자의 흘끔거림도 사라졌다.

정민은 여자의 정수리를 노려보았다. 키가 큰 여자의 정수리가 정민의 코끝을 간질였다. 괜히 큰 숨을 내쉬다가 또다시 치한 취급을 당할까 봐, 정민은 날숨과 들숨에 예민하게 신경 썼다. 이러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지만, 그래도 치한 취급을 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런데 작은 문제가 하나 생겼다. 이어폰을 꽂긴 했는데, 음악을 플레이하지 않은 것이다.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 들고 이어폰을 연결해야 하는데,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옅은 한숨이었는데, 여자가 흠칫 움츠리는 것이 느껴졌다. '젠장 할.' 그런데, 이게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민이 재빠르게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덜렁거리며 늘어져 있던 이어폰을 연결했다. 순식간에 해치운 일이었다. 자부하건대 3초도 걸리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짜증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정민도 화가 났다. 겨우 3초라고. 그 정도의 접촉도 불쾌했다면, 사람 많은 버스는 타지 말았어야지.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말이 터지기 직전, 어디선가 ‘띠링’ 휴대폰이 울렸다. 정민이 자신의 휴대폰인가 싶어서 고개를 숙인 순간, 앞에 있던 여자가 부산스러운 움직임으로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여자는 팔꿈치로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사람들이 불쾌한 표정으로 여자를 흘끔거렸지만, 여자는 턱을 치켜들었다. 정민의 입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느덧 지하철역까지 한 정거장이 남았다. “이번 역, 이번 역은 MJ 역입니다.” 방송이 나오자, 사람들이 일제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미리 움직인다고 해서 빨리 내리는 것도 아닌데, 다들 왜 이렇게 급하게 움직이는 건지 정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민 역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출입문을 향해 몸을 틀었다.


8시 10분.

드디어 버스 문이 열렸다. 잠시나마 바짝 붙어서 살을 마주하던 사람들이 징그러운 벌레라도 털어내듯 서로를 밀치며 우르르 내리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린 정민 역시 그들과 똑같이 양팔과 옷을 털어냈다. 입은 지 30분도 지나지 않은 깨끗한 옷이었지만, 정민은 ‘퍽퍽’ 깨끗이도 털어냈다.

작은 마을버스 안에 도대체 몇 명이나 탄 건지, 버스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토해냈다. 그리고 토해진 사람들은 곧바로 지하철역이라는 거대한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정민 역시 뭔가에 홀린 듯 지하철역으로 스르르 걸어갔다. 그러나 시선은 역 앞에 줄지어 선 무가지*(free newspaper) 신문대로 향했다. 30분 넘게 지하철을 타야 했기에, 무료한 시간을 보낼 만한 재미가 필요했다. 예전에는 책을 들고 다녔는데, 무가지 신문이 나온 이후로는 신문을 애용했다.

(*휴대폰으로 전화나 문자만 하던 시절, 지하철역 앞에는 무가지 신문대가 늘어서 있었다.)

“다 나갔나 보네.”

정민은 비어 있는 가나 신문대를 보고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읽을거리가 많은 '가나 신문'은 무가지 신문 중에서 단연 인기였다. 사람들이 제일 먼저 가져가는 신문이기에 빨리 선점해야 하는데, 잠시 주춤거리는 사이 다 가져간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정민은 '가나 신문' 대신 내용이 부실한 '마바 신문'을 집어 들었다. 무료한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하는지, 벌써부터 지루해졌다. 내리자마자 재빠르게 왔어야 했는데, 정민이 찰나의 후회를 뒤로하고 걸어가는데, “앗.” 행운도 이런 행운이 없었다. 역 바로 앞에 있던 가나 신문대에 마지막 한 부가 남아 있던 것이다. 신이 난 정민은 재빠르게 '가나 신문'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이건 어쩌지.”

이미 쥐어져 있던 '마바 신문'을 잠시 쳐다보던 정민이 슬쩍 주위 눈치를 보고는 '마바 신문'을 가나 신문대 위에 올려놓았다. 원래대로 가져다 놓기도 귀찮았고, 촉박한 시간도 발목을 잡았다. '가나 신문'을 옆구리에 낀 정민이 총총거리며 지하철역으로 들어갔다.


8시 52분.

정민은 간당간당한 시간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팀장이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정민은 팀장의 못마땅한 시선을 무시하고, 당당하게 탕비실로 가서 커피를 내렸다. 커피 향이 퍼지자 하나 둘 동료들이 모여들었다. 하하 호호, 가벼운 수다를 떠는데, ‘으흠’ 거리며 팀장이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무슨 일 있어.’ 정민은 옆 자리 김 대리에게 입 모양으로 물었다. 김 대리가 입꼬리를 내리고, 어깨를 으쓱한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하루 몸 사리자며, 다들 조용히 자리로 돌아갔다.


11시 50분.

점심시간 10분 전. 직원들이 서로 눈을 맞추며 몸을 들썩였다. 그 순간, “주 대리, 오늘 약속 있나?”라며 팀장이 정민에게 물었다. 왜 하필 나야. 정민이 불안한 눈동자를 감추지 못하고, 김 대리를 슬쩍 쳐다봤다. 김 대리의 시선이 허공을 향한다. 오호, 배반하겠다, 이거지. 혼자 죽을 수는 없지. 정민이 “김 대리랑.”이라고, 입을 여는 순간 김 대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저는 먼저 약속이 있어서 나갑니다.”라고 말하고는, 쌩하니 밖으로 나갔다. 간절하게 쳐다봤지만, 김 대리는 입 모양으로 ‘혼자 죽어.’라고 외쳤다. 정민은 눈물이 핑 돌았다. 김 대리를 따라 다른 직원들도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자, 가지. 주 대리.”

“네.”

유일하게 숨통이 트이는 점심시간인데, 왜 하필, 팀장님과, 이건 악몽이야! 정민은 자신을 버리고 간 직원들이 원망스러웠다. '가나 신문'을 손에 넣었을 때, 오늘 하루 운이 좋으려나 했는데, 정민은 삐쭉 나온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후 1시.

밥을 먹고 들어오니, 자리 위로 커피 한잔이 놓여있다. 정민은 김 대리를 쳐다보았다. 김 대리가 “미안” 이라며, 장난스럽게 사과했다.

“됐거든.” 정민은 퉁퉁거렸지만, 커피는 받아 들었다.

“나는 그제 갔었잖아. 그나저나, 주 대리 어떻게 날 끌어들일 수가 있어? 이거 배신이야.”

“혼자보다 둘이 낫잖아. 나도 그저께 출장 아니었으면, 김 대리 따라갔다고.”

“그나저나 팀장님 하고는 어땠어?”

“뭘 어때? 똑같지.”

“또, 골프?”

“관심도 없는 골프 이야기를 왜 그렇게 하는 거야. 호응도 한 두 번이지. 그래도 김 대리는 골프 치잖아.”

“운동 삼아 몇 번 쳐본 거야, 아, 팀장 들어온다.”

김 대리가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정민은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김 대리가 ‘툭툭’ 정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후 6시 30분.

정민은 퇴근할 생각이 없는 팀장을 흘겨보았다. 친구와의 약속에 늦지 않으려면, 지금 출발해야 했다.

“나 약속 있어서, 지금 나가야 하는데.” 주 대리는 김 대리 옆구리를 꾹 찌르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알았어. 나 오늘 야근이라 늦게 갈 거야.”

김 대리 말에 정민은 환호했다. 김 대리가 있으면, 먼저 간다고 해도 별말을 안 할 것이다. 잽싸게 짐을 챙긴 정민이 주뼛거리며 팀장 앞으로 갔다.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팀장이 흘끔 시계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정민은 직원들에게 인사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끈거렸던 관자놀이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해졌다. 정민의 입가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 형사의 11월 11일 일상


김 형사는 밤샘 작업으로 눈 밑까지 내려온 다크서클을 검지로 꾹꾹 눌렀다. 알싸한 통증에 보이지도 않는 애교 살이 바르르 떨려왔다. 실룩이는 눈가를 손끝으로 가만히 누르고 있는 김 형사 옆으로 양손에 종이컵을 든 최 형사가 다가왔다. 최 형사가 김 형사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김 형사님, 여기 커피.”

“안 그래도 커피 마시고 싶었는데, 고마워.”

눈 밑을 누르던 손으로 커피를 건네받은 김 형사가 커피를 마시려다가 잠시 멈칫한다. 그러자 최 형사가 씩 웃으며, 말했다.

“설탕 세 스푼, 맞죠?”

허허 너털웃음을 흘린 김 형사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호로록 커피를 마셨다. 최 형사는 까치집이 되어버린 김 형사의 머리를 흘끔 쳐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김 형사님, 오늘은 집에 들어가세요. 벌써 삼일째인가요? 그러다가 형수님한테 쫓겨납니다.”

김 형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 그래도 가려고 했어. 이제 한계야, 피곤해 죽겠어.”

양 미간을 손가락으로 꽉 누르는 김 형사는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 피곤한 모습이었다. 끙 앓는 소리를 내는 김 형사의 등을 최 형사가 어서 들어가라며 떠밀었다. 김 형사가 알겠다며, 한 손을 흔들고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사건입니다. 사건!" 다급한 목소리가 사무실 안에서 들려왔다. 

김 형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피식 웃었다. 최 형사가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타이밍 기가 막히네요.”

“그러게 커피는 왜 줘서, 안 그랬으면 벌써 갔잖아.”

“흑, 죄송합니다.”

장난스럽게 고개를 숙이는 최 형사의 어깨를 툭툭 치며, 김 형사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야?" 김 형사의 질문에 "누가 죽었대. 빨리 현장으로 가. MJ 지하철 앞이야."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죽었다고? 설마 살인 사건? 김 형사가 두 눈을 찔끔 감았다. 오늘도 집에 가기는 그른 것 같았다. 며칠 후에 있을 막내딸의 생일 파티가 떠올랐다. 생일 전에는 무조건 해결해야 하는데, 김 형사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김 형사는 제발 살인 사건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한 시간 후, 김 형사는 정신 못 차리는 젊은 남자 하나를 경찰서로 잡아왔다.

“야, 내가 누군 줄 알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김 형사는 사람을 죽여놓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행패를 부리는 남자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피해자는 가진 거 하나 없는 칠십 대 노인이었다.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가만히 있던 노인에게 욕설을 내뱉던 남자가 노인이 한마디 하자 갑자기 확 밀어서 넘어트리고는 마구잡이로 때렸다고 했다. 뭔가에 씐 사람처럼 무섭게 난리를 치는 바람에 말리지 못했다고 말하던 목격자의 눈동자는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잠시 후, 경찰서 안에서 난동을 부리던 남자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조용해졌다. 남자는 동공에 지진이 난 것처럼 사정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뭔가를 계속해서 웅얼거렸다. 김 형사의 입술 사이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저놈 정신이 든 거야? 아니면 더 나간 거야?”

잠시 후, 주머니를 마구잡이로 더듬거리던 남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통화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남자를 잡아 왔을 때, 현장에는 깨진 휴대폰이 하나 있었다. 증거품이라서 가져왔는데, 남자의 휴대폰인 거 같았다. 김 형사는 본인의 휴대폰을 남자에게 건넸다. 눈치를 보며 휴대폰을 건네받은 남자의 손이 잘게 떨려왔다. 아직 20대로 보이는데, 사람을 죽였으니, 심장이 떨리고, 미칠 지경이겠지. 딱 봐도 약을 한 게 분명했다. 약에 취해 일을 저질러 놓고, 이제야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다. 김 형사는 혀를 찼다. 그런데 남자의 표정이 통화를 하면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불안한 표정이 사라지고, 점점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짓기 시작하더니, 통화를 마무리할 때는 처음 보았던 거만하고 오만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남자를 예의 주시하고 있던 김 형사는 왠지 사건이 쉽게 풀릴 거 같지 않다는 느낌에 잘게 몸을 떨었다. 오랜 형사 생활의 감이었다. 사건 당시, 역 근처에는 꽤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중 가까이에서 목격한 목격자도 여럿 있었다. 남자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은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찜찜한 기분이 드는 걸까? 그런데 이 찜찜함은 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실체가 드러났다.

“김 형사,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그러니까 뭘요.”

“위에서 내려온 지시야.”

“살인입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야. 자신이 죽였다는 사실조차 인지 못하고 있잖아.”

물론, 남자한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약을 했을...”

팀장이 김 형사의 말을 끊으며, 손을 내저었다.

“김 형사, 나는 자네를 놓치고 싶지 않아. 형사 2팀의 유 형사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잘 생각해 보라고.”

김 형사는 사십 대 가장이었다. 세상에서 말하는 여우 같은 아내에, 토끼 같은 자식이 둘이나 있었다. 큰 애가 내년에 중학교에 입학한다. 김 형사는 얼마 전 학원비가 걱정이라던 아내의 말이 떠올랐다. 갑자기 위가 따갑고, 쓰려왔다. 체했을 때 느꼈던 묵직함이 아랫배를 짓눌렀다. 팀장이 김 형사를 향해 손을 저었다. 더는 할 말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김 형사는 알고 있었다. 팀장의 표정이 자신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는 거겠지. 팀장도 어쩔 수 없는 거야. 다 알고 있지만, 입안에서 느껴지는 텁텁함이 가시질 않는다.


최 형사는 우울해하는 김 형사를 끌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갔다. 속이 안 좋아서 먹기 싫다는 김 형사를 최 형사가 강제로 끌고 갔다. 최 형사도 김 형사도 말없이 깨작거리며 밥알만 새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낯익은 얼굴 하나가 생글거리며 김 형사에게 다가왔다.

“김 형사님. 아, 최 형사님도 같이 계시네요.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그런데, 점심이 늦네요.”

친근하게 안부를 묻는 정 기자를 보고 최 형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최 형사는 유독 기자를, 그중에서도 특히 눈앞에 있는 정 기자를 싫어했다. 예전에 최 형사가 맡았던 사건 하나가 언론을 타면서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당시에 최 형사가 친분이 있던 정 기자에게 결과가 나올 때까지 터트리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알려준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정 기자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그 후 형 동생 하며 친하게 지내던 둘 사이는 완전히 틀어져버렸다. 최 형사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뻔뻔하기도 해라.”

정 기자는 최 형사의 말에도 싱글벙글 웃었다. 싸한 분위기에 김 형사가 서둘러 정 기자에게 물었다.

“정 기자도 식사하려고 들어왔나?”

“아뇨. 식사보다 김 형사님이 보여서 들어왔죠.”

“나? 날 왜?”

“그게 저.”

정 기자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김 형사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최 형사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저 치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최 형사가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 데도 정 기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김 형사에게 "귀 좀 가까이"라고 말했다.

“왜? 무슨 일인데?”

김 형사 역시 기자들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싫어하지도 않았다. 기자들 덕에 파헤친 사건도 꽤 있었고, 언론의 힘을 빌려서 덮으려던 사건을 드러나게 한 적도 종종 있었다. 김 형사에게 기자는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해 주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 그런 관계였다. 그래서 배신감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김 형사의 눈치를 살피던 정 기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형사님, 제가 조금 전에 경찰서에서 아는 사람을 봐서요.”

“아는 사람?”

“그게, 저 오전에 MJ 지하철역에서 일어난 사건이요.”

김 형사의 손이 살짝 떨려왔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칠십 대 노인이 죽었지.”

“살인이죠?”

김 형사가 가늘게 뜬 눈으로 정 기자를 쳐다보았다. 아침에 일어난 사건은 당연히 언론에 나올 것이다. 그러나 곧 덮일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사건이었다.

“살인이라고? 우리는 살인사건이라고 말한 적 없는데. 젊은 남자랑 노인이 말다툼 끝에 노인이 뒤로 넘어가면서 뇌진탕으로 사망. 남자의 말에 따르면 흥분해서 자기를 때리던 남자를 방어하는 도중에 노인이 스스로 뒤로 넘어갔다고 하더군. 남자는 노인을 안정시키려고 했다던데?”

정 기자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변해갔다. 그리고 한쪽 입가를 바르르 떨며 말했다.

“그래요? 그럴 리가요. 그놈이 그렇게 착한 놈이 아닐 텐데요.”

“그놈? 너 그 자식 알아?”

정 기자의 말에 최 형사도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네. 형님. 아니, 최 형사님. 이번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저번 사건에 대한 빚이라고 생각하세요. 저 그놈한테, 아니 정확히는 그놈 아버지지만, 여하튼 빚이 좀 있어서요. 이번 사건 제가 좀 파고들어도 되겠습니까?”

최 형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김 형사를 바라보았다. 위에서 덮고 넘어가자고 한 사건이었다. 괜히 건드렸다가 피를 보는 건, 당연히 담당인 김 형사일 것이다. 김 형사는 턱 끝을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뭔가 결심이 선 듯, 정 기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대놓고 지원은 불가.”

정 기자의 입꼬리가 하늘을 뚫을 듯이 올라갔다.

“그럼요. 절대 김 형사님한테 피해 안 가게 하겠습니다.”

정 기자의 눈동자가 강렬하게 이글거렸다. 최 형사는 불안한 눈빛으로 정 기자를 쳐다보았다.



 한 직장인의 11월 12일


오전 6시 50분. 정민은 여느 때처럼 일어나자마자 7시 뉴스를 보기 위해 TV를 켰다. 그리고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냉장고 문을 열다가 "MJ 지하철역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라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TV 앞으로 다가왔다. MJ 지하철이라면 매일 가는 지하철역인데, 사건이 일어난 시간이 어제 오전 8시 전후라고 하는 소리에 정민이 소르르 소름이 돋은 양팔을 감싸 안았다. 오늘은 다른 역으로 가야겠는데. 정민은 시계를 흘끔거리며, 평상시와 다른 일정을 맞추기 위해 서둘러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한 직장인의 11월 13일


오전 6시 50분 알람 소리에 정민이 잠에서 깼다. 정민은 버둥거리며 이불을 걷어내고는 평상시와 똑같이 7시에 뉴스를 트는 것으로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내용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뭐라고?"

정민은 뉴스에서 나온 기사를 잘못들은 건가 싶어서 물을 따르다 말고 후다닥 TV 앞으로 왔다. 아나운서의 명랑한 하이톤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기사 내용에 정민의 입이 쩍 벌어졌다.

“현재 청와대에서는 아무런 공식 답변이 없습니다. 하지만, 현직 대통령이 비리를 저지른 증거가 속속 드러나고 있기에.”

비리라니, 비리라니. 정민은 믿을 수가 없었다. 현직 대통령은 헌정 사상 최초로 강직하고, 정직하며, 한치 부끄러움도 없는 정치활동으로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인물이었다. 대통령은 언제 어디서나 당당했고, 그 어떤 이들에게도 소신 있게 발언했으며, 아주 사소한 거라도 옳지 못한 것에는 물러섬이 없는 사람이었다. 몇 년 동안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위에 오를 정도로 대통령은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었다.

뭔가 잘못된 거겠지. 정민이 웅얼거렸다. 절대로 그럴 분이 아닌데. 하지만, 대선 때 특정 기업으로부터 불법 자금을 받았다는 명백한 증거가 영상을 타고 흘러나오는 순간, 정민은 "헉"하며 작은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휴대폰이 미친 듯이 띠링거리기 시작했다. 뉴스 봤느냐, 말도 안 된다, 믿을 수 없다, 대통령까지 그럴 줄이야, 배신감 느낀다, 등등 수많은 문자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나하나 답을 해주며 정민도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대통령이 비리를 저질렀든 말든 일단 정민은 출근을 해야 했다. 정민은 이런 긴박한 상황에도 똑같은 시간에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회사로 가야 한다는 사실에 갑자기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정민은 서둘러 출근 준비를 마치고, 평상시처럼 MJ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칠십 대 노인의 살인사건은 잊힌 지 오래였다. 부정부패의 ‘부’ 자만 들어도 이를 부드득 갈던 강직한 대통령의 연설이 끊임없이 라디오와 방송을 통해 흘러나왔다.



 한 직장인의 11월 14일


오전 7시 10분. 뉴스를 보던 정민의 입에서 탄식의 소리가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어젯밤 누군가가 농담 삼아 말한 이야기가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정민은 벌어진 입을 한쪽 손바닥으로 감싸 안았다.

어젯밤 회식의 주제는 단연 대통령 비리사건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몇몇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으면, 그중 하나는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며, 다들 너무 맹목적으로 현직 대통령을 지지했다며 쯧쯧 혀를 찼었다. 갑론을박이 이어지던 중에 누군가 이런 말을 던졌다.

"비리 사건이 진실이든 아니든, 우리가 본 대통령의 강직하고 올곧은 성향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어. 그건 확실해. 그럼, 우리가 아는 대통령은 이번 사건을 견뎌낼 수 있을까?"

지금 TV에서 나오는 내용은 ‘견뎌낼 수 없다.’가 정답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대통령이 생사의 고비에 놓여 있다고 전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평상시와 다르게 살짝 떨려왔다. 대통령은 오전에 있을 담화문 발표를 위해 집무실에 모인 참모진에 의해 발견됐다고 했다. 대통령 주위로 다량의 수면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며, 참모진 중 한 사람의 인터뷰가 흘러나왔다. 청와대는 과다 수면제 복용으로 말미암은 혼수상태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를 믿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한참 뉴스를 보고 있던 정민이 흘끔 시계를 쳐다보고는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다. 벌써 7시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앉아 있으면, 지각이었다. 그런데 지각이라, 지각. 뭐 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 완벽하다는 대통령도 비리를 저지르고, 심지어 혼수상태라는데, 한 나라의 수장이 일상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상황에 놓여있는데, 왜 우리만 이렇게 아등바등 지각하지 않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 건지 정민은 허무했다.

정민은 대충 세수만 한 채, 아무 옷이나 집어 들고는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갔다. 대통령이 비리를 저지르든 아니든, 현재 생사를 오가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버스 안에서도 대통령 관련 뉴스는 계속되었고, 지하철 안에서도 대통령 관련 소식을 전하는 신문들도 가득했다. 몇몇은 대통령 관련 이야기로 설왕설래하고 있었지만, 정민은 조용히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리고 청각과 시각을 완벽하게 차단한 채, 조용히 자신만의 세상으로 빠져들었다.


잠시 후, 정민은 급하게 나오느냐고 바지와 어울리지 않는 셔츠를 입은 것이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점심시간 때 시간을 내서 근처 옷가게라도 가야 하는 건지 고민에 빠져 있는데, 또다시 귓가로 대통령의 이야기가 흘러들어왔다. 앞으로 며칠은, 아니 몇 달이 될 수도 있지만, 대통령 소식으로 나라는 떠들썩할 것이다. 대통령은 결국 죽는 것인가? 아니면 일어나실 것인가? 일어나시면, 비리에 대해 말씀을 하실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묻힐 것인가? 궁금하긴 했지만, 궁금하다고 알 수 있는 내용도 아니었다. 그냥 사람들의 대화거리 정도 되지 않을까? 아마 점심시간이나 회식 때 직원들과 대화거리가 없어서 어색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 나한테 있어서 딱 그 정도지. 뭐.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그나저나 이 셔츠, 진짜 마음에 안 드는데 어쩌지. 점심때 새로 사던지 해야지. 신경 쓰여서 안 되겠어.”

정민은 구겨진 셔츠를 손으로 매만지며, 미간을 찌푸렸다.



 살인사건이 터진  (한 대기업 회장한 때)


“톡, 톡, 톡.”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마오가닉으로 된 고급 테이블을 손톱으로 톡톡 두드렸다.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보이는 노인의 행동이었다. 노인의 반대편의 앉아 있던 중년의 남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장님.”

회장이라고 불린 남자의 입매가 굳게 다물어진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몇 시간 사이에 부쩍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중년의 남자는 노인에게 이제 결정을 내리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독촉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노인은 뭔가를 결심한 듯, "정보는?"이라고 물었다. 중년의 남자가 조심스럽게 노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낚아채듯 봉투를 집어든 노인은 봉투 안에 있는 내용물을 꺼내 들고는, 재빠르게 읽어나갔다.

“정 성훈이라. 정 성훈, 정 성훈,” 노인의 웅얼거림에 앞에 앉은 남자가 설명을 시작했다.

“네. 메이저 신문사에 있다가 잘렸는데, 아마 그 사건으로 회장님께 억하심정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노인은 기억도 나지 않는 풋내기 기자를 떠올리기 위해 오른쪽 관자놀이를 한참을 누르고 있어야 했다.

“기억나지 않아.”

“기억할 필요도 없는 피라미입니다.”

“그래, 기억할 필요도 없는 피라미지. 그런데.”

그런데 지금 그 피라미가 나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단 말이지. 노인은 속으로 말을 삼키며, 중년의 남자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중년의 남자가 조심스럽게 노인 곁으로 다가섰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이들은 모두 매수하였습니다. 솔직히 목격자가 있다고 해도, 사람의 기억이란 것이 원래 정확하지 않으니까요. 조금만 비틀어도 양심의 가책 없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건 아주 쉽죠.”

특히나, "돈 앞에서는"이라고 중년의 남자가 덧붙였다.

“애송이는”

“애송이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닙니다.”

“그럼.”

“무너진 자존심이라는군요.”

노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허허,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자존심이라니, 노인은 애송이의 자존심 따위를 신경 써야 하는 현실이 몹시 불쾌했다.

“그냥 큰 도련님 때처럼 잠시 교도소에 살다 나오게 하는 것이.”

“그건 안 돼.”

너무 오냐, 오냐 키운 것이 죄라면 죄겠지. 그녀의 아이가 아니었으면, 내쳐도 진즉에 내쳤을 것이다. 불쌍해서, 안타까워서, 점점 제 엄마를 닮아가는 아이가 애틋해서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해줬었다.

“그나저나 MJ 지하철은 왜 간 거랍니까? 거기다 차도 없이.”

중년 남성의 말에 노인의 양쪽 입가가 살짝 비틀렸다. 제 엄마를 만나러 간 것이 분명했다. 고급 차를 타고 나타나면 질색팔색할 것을 알고 있기에 제 나름 머리를 쓴 걸 텐데. 노인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노인은 두 손을 잡고 이마에 대고는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중년의 남자가 말을 이었다.

“원하는 게 없는 인간이 가장 무서운 법입니다. 아시다시피, 몇 년을 회장님 주위를 맴돌던 놈입니다. 회장님한테 나올 것이 없으니, 막내 도련님 쪽으로 움직였겠지요. 큰 도련님이야, 이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나왔고, 자숙하느냐고 대외 활동을 안 하고 있으니까요."

중년의 남자는 막내아들한테 유독 약한 노인이 안타까웠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사랑받는 깨끗한 기업이라는 이미지는 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큰아들이 사고를 쳤을 때 잘못을 했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며 매몰차게 등을 돌린 회장이었다. 사모님이 무릎까지 꿇고 교도소에 보내는 것만은 막아달라고 했지만, 전혀 흔들리지 않았었다. 이에, 회사의 이미지는 더욱더 좋아졌고, 매출은 수직 상승을 이어갔다. 이번에도 똑같이 행동해야 하는데, 다른 일도 아니고, 사람을 죽였다. 그냥 사건도 아니고 살인사건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막대 도련님이 회장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애송이, 정 기자가 알아낸 건지. 자그마치 5년을 쫓아다녔다고 하니, 알 수도 있었을 것이다. 중년의 남자 입가에서 깊고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한숨 소리에 노인의 고개가 서서히 들렸다.

“회사도, 막내도 살릴 방법을 찾아내.”

그냥 막내아들을 버리면 되는데, 왜 유독 막내아들한테만 저리 약하신 건지. 노인의 주름진 이마를 바라보던 중년 남성의 관자놀이로 불끈 힘줄이 치솟았다. 중년 남성은 회장을 힘들게 한 막내 도련님도 애송이 기자도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바로 회장이 오랜 망설임 끝에 직접 전화해서 아들의 선처를 부탁했는데도 매몰차게 거절한, 바로 현직 대통령이었다. 안 그래도 계속 신경이 거슬렸는데, 모래성처럼 쌓아놓은 명성이 언제까지 이어질 거라고 생각한 건지. 중년 남성의 눈동자에 작은 열기가 타올랐다.



 살인사건이 터진 날 (한 형사의 한 때)


김 형사가 양 미간을 꾹꾹 누르며 묻고 또 물었다. 그런데 이 정신 나간 놈은 입을 꾹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경찰서 문만 힐끔거렸다. 잠시 후, 양복을 쫙 빼입은 한 남자가 나타나서 김 형사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법무법인 제일의 김고 변호사. 대한민국 최고의 법무법인에서 근무하는 변호사의 등장에 정신 나간 놈의 겁먹은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다리까지 꼬꼬 앉아서 거만하게 입가를 실룩였다. 미친놈. 아무리 봐도 미친 게 분명했다. 아니면, 아직 약 기운이 완벽하게 안 떨어진 건지. 정신 나간 놈은 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계속해서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다.

“그래서 왜 때렸습니까?”

김 형사가 작게 한숨을 쉬며, 다섯 번째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변호사가 정신 나간 놈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정신 나간 놈이 변호사의 고갯짓에 무슨 힘을 얻었는지, 갑자기 짜증을 팍 내며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 댔다.

“때릴만하니까 때렸지요.”

“그러니깐 왜 때렸느냐고요.”

“내가 미친놈도 아니고, 가만히 있는 사람을 때렸겠습니까?”

김 형사는 속으로 그래 너는 그럴 놈이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물었다.

“아는 사람이었습니까?”

“누구요? 그 노친네? 내가 그런 거지 같은 노친네를 어떻게 알아요. 그런데, 당신 내가 누군지 알면...”

그 순간 변호사가 흠흠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끊었다. 정신 나간 놈이 눈치를 슬쩍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럼 잘 알지도 못하는 노인을 밀치고 때렸단 말씀입니까?”

김 형사는 입에서 정말 쌍욕이 나왔지만,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꾹꾹 눌러 말을 뱉었다.

“알지 못하기는, 하나는 알죠. 그 노친네가 무가지 신문을 관리한다는 사실.”

"뭐요?"

김 형사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일을 못하니까 때렸지. 어떻게 "가나 신문"을 놓는 신문대 위에 "마바 신문"이 놓여 있느냐고요. 그렇게 막 섞어서 신문을 놓으면, 서로 다른 신문대가 왜 필요합니까? 안 그래요, 형사 양반? 하여튼 일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노친네 때문에 이게 뭐야. 오늘 엄마 만나러 가야 하는데. 아, 짜증 나 죽겠네. 그나저나 변호사 양반, 나는 언제쯤 나갈 수 있는 거야.”

변호사를 향해 징징대는 정신 나간 놈을 바라보면, 김 형사가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사소한 일이었다. 겨우 잘못 놓인 신문 하나 때문에 사람을 죽이다니. 김 형사의 미간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김 형사는 형식상의 심문을 마치며,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반드시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좀 전에 전화로 오늘 못 들어오면, 쫓겨날 생각하라는 아내의 목소리를 상기시키며, 김 형사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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