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이야기(소설)
한참을 창 밖을 바라보던 현희가 갑자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동욱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무슨 말이야?"
현희는 창 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떨어지는 잎사귀를 보니까, 가을은 가을인가 봐. 꼭 마지막 잎새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야."
동욱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그런 말 하지 마."
답답하다고 열어둔 창문 사이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흩날리는 현희의 머리카락을 본 동욱이 빠르게 창문을 닫았다.
"왜? 시원하고 좋은데."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 나."
동욱은 담요 하나를 꺼내서 현희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현희는 담요를 여미며 동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만약 내가 마지막 잎새의 주인공이라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나를 위해서 나뭇잎을 그려줄 거야?"
장난스럽게 웃는 현희를 잠깐 바라보던 동욱은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 속에서 볼품없이 자리한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하필이면 메말라 가는 나무가 보이는 풍경이라니. 동욱은 병실을 옮겨달라고 말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동욱아. 어떻게 할 건데."
현희는 여전히 짓궂은 표정으로 동욱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찰나의 순간, 동욱의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들이 휙휙 지나갔다. 거대한 나뭇판을 나무 뒤에 놓으면 그릴 수 있지 않을까? 나뭇판을 세우려면 병원이나 구청에 도움을 받아야 하나? 진지한 동욱의 표정에 현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뭘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해."
동욱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너는 마지막 잎새의 주인공이 아니니까."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현희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감추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있잖아, 동욱아. 나는 미련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줄 알았어. 그렇잖아. 내 나이 겨우 38살이야. 우리 딸 연이는 8살이고."
현희의 눈가가 촉촉해진다.
"나 연이가 학교 가는 것도 보고 싶고, 결혼하는 것도 보고 싶고, 나중에 연이가 낳은 아이도 안아보고 싶어."
동욱이 다급하게 말했다. "볼 수 있어." 하지만, 연약한 현희의 모습에 곧바로 고개를 떨군다. 현희는 동욱을 끌어당겨서, 자신의 옆 자리에 앉혔다.
"동욱아, 그런데 나 이제 세상에 대한 미련 같은 거 없어."
동욱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현희는 애써 동욱의 시선을 외면했다.
"어차피 죽으면 아무것도 모르잖아.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현희야."
동욱이 애닮은 목소리로 현희를 불렀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버리지 마, 나랑 우리 연이 버리지 마."
그 말을 들은 현희가 조심스럽게 동욱과 시선을 마주했다.
"동욱아, 나 여전히 죽음이 두려워. 그런데 미련 때문이 아니야. 너랑 연이 때문에 두려워."
"나랑 연이 때문에 두렵다고?"
현희의 한쪽 볼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떨어진다.
"내가 가고 나면, 너랑 연이가 아프잖아. 나는 그런 아픔 모르겠지만, 너랑 연이는 많이 아플 거잖아. 나 그게 너무 무서워. 그래서 죽고 싶지 않아."
동욱이 현희를 힘껏 끌어안았다.
"맞아. 네가 떠나면 나랑 연이는 아플 거야. 많이 힘들 거야. 네가 상상한 것보다 더 많이 상처받을 거야. 그러니까 가지 마. 절대 떠나지 마."
현희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포기를 못하겠어. 나 죽는 건 하나도 안 무서운데, 너랑 연이 때문에 무서워 죽겠어. 죽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프게 하니까' 그래서 두려워."
동욱은 안도했다. 현희가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행동했을 때, 동욱은 불안했다. 이렇게라도, 이런 방식이라도 네가 삶에 대한 미련을 가질 수 있다면, 동욱은 현희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마주 웃던 현희가 뭔가가 생각났는지, 서둘러 말을 꺼냈다.
"맞다. 그런데 동욱아, 너는 절대로 마지막 잎새의 아저씨처럼 나를 위해서 나뭇잎 같은 거 그리면 안 돼. 소설 속에서 나뭇잎을 그렸던 아저씨는 잎새를 그리고 나서 많이 아팠잖아. 나 그건 절대 싫어."
주인공 대신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소설을 자세히 기억하지 못했던 동욱은 순간 '대신 아플 수 있다고? 진짜 그려봐?'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현희의 걱정 어린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안 그럴게."
현희가 동욱의 손을 조심스럽게 그러쥐었다.
"나도 사랑하는 당신과 연이를 위해서 힘낼게."
창 밖의 볼품없는 나무 한 그루가 따스한 바람에 맞춰서 부드럽게 흔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