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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다서영 Apr 07. 2023

바람 구름

짧은 이야기

어린 소년 하나가 낡은 시골집 마당, 작은 꽃밭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는 짧은 한숨을 내쉰다.

“우리 똥강아지 무슨 고민 있어?”

인자한 미소의 한 할아버지가 어린 소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할아버지, 속상해 죽겠어요. 곧 있으면 학교 회장 선거인데, 저 진짜 회장 되고 싶거든요. 잘할 자신도 있고, 그런데 자꾸 정훈이가 애들한테 맛난 거 사주고 그러잖아요.”

“정훈이?”

속상한 마음을 드러내는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는 그저 귀엽기만 하다.

“네. 저랑 같이 후보에 오른 친구요. 얼마 전에는 정훈이 엄마가 와서 학교 애들 모두한테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갔어요. 쳇, 엄마까지 동원하고, 비겁해. 그래서 그런지 애들이 정훈이는 아는데, 나는 잘 몰라요.”

“그런 일이 있었구나.”

손자의 고민을 이해한 할아버지는 허허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입이 댓 발 나온 어린 손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나지막이 말했다.

“수민아, 저기 저 구름 좀 봐. 오늘 참 특이하지.”

할아버지의 말에 땅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수민이 빼꼼히 눈동자를 위로 올린다.

“와아~, 구름이 꼭 바람 같아요!”

어느 화가가 흰 물감을 묻힌 얇고 가는 붓으로 거침없이 붓질한 것처럼 하늘색 도화지 위 구름은 바람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래. 바람이 모습을 드러냈구나.”

“모습을 드러내요?”

“수민아, 바람을 본 적 있니?”

“바람을 어떻게 봐요.”

수민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렇지. 바람은 볼 수 없지. 그런데 수민아, 방금 네가 구름이 바람 같다고 했잖아. 바람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바람 같다고 했을까?”

“그러네. 왜 바람 같다고 했을까?”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 똥그랗게 뜬 어린 손자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할아버지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거야, 바람이 알려줬으니까 알았지.”

“바람이 알려줘요?”

“그래. 하지만, 바람 혼자서는 힘들어사실, 할아버지는 바람과 친구란다.”

“진짜요?”

할아버지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손자의 귀를 잡고는 소곤거렸다.

“보여줄까? 대신 비밀이야. 할아버지가 바람과 친구라는 사실은?”

“네, 쉿. 비밀. 할아버지, 어서 보여주세요.”

기대에 찬 표정으로 초롱초롱 눈을 반짝이던 수민이가 잠시 뜸을 들이는 할아버지를 조른다.

"그럼 이제 불러보자, 바람아, 내 손자가 네 모습을 보고 싶어 해. 보여주겠니?"

큰 소리로 외친 할아버지는 수민의 손을 잡고는 조용히 소곤거렸다.

"바람이 잠깐 기다리라고 하네."

수민은 침을 꼴깍 삼키며,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마침 하늘 위로 뭉개 구름 하나가 지나가고 있었.

잠시 후,

"할아버지, 구름이 흐트러져요. 또다시 바람이 되고 있어요. 구름이 바람이 되고 있어요."

수민이는 양팔을 번쩍 올리고 뱅글뱅글 돌며 소리를 질렀다.

"이제 구름이 바람이 되는 걸 이해했지?"

"네. 바람은 구름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줘요."

“그렇지. 바람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 때 구름에게 도움을 받지.”

“할아버지, 나도 바람과 친구가 되고 싶어요.”

수민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눈을 반짝였다.

“그럼. 네가 원한다면 당연히 될 수 있지.”

인자한 표정으로 어린 손자를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아련한 기억을 되새기며 하늘 위 모습을 드러낸 바람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수민아, 바람은 구름이 없으면, 모습을 드러낼 수 없어. 구름도 바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

할아버지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수민은 그저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릴 뿐이다.

“지금은 네 존재를 모르는 애들이 많을 거야. 그저 아이들 옆에서 바람처럼 친구가 되어 주렴. 곧 아이들은 너를 보고 싶어 할 거다. 그럼 그때 너를 보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통해서 네 모습을 드러내렴.”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할아버지? 어려워요.”

수민은 할아버지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미간을 찡그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할아버지는 그저 허허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구름을 통해서 바람이 모습을 드러냈듯이, 내 손자 역시 그리되기를.”

혼잣말처럼 낮게 웅얼거리는 할아버지의 낮은 음성이 어린 수민의 귓가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


40년 후, 수민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시작했다.


<수민의 연설 중>
국민은 지도자가 없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도, 발전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럼, 우리에게는 어떤 지도자가 필요할까요?
우리는 국민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지도자를 만나야 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국민과 하나 됨 속에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드러내는 지도자 말입니다.
지도자는 구름을 통해서 드러나는 바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 드러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지도자는 구름과 함께할 자격이 없습니다. 진실한 지도자는 국민을 통해서만 자신의 가치가 드러날 것입니다.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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