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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다서영 Mar 26. 2023

거울의 방

짧은 이야기(꿈을 꾸다)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친구의 손을 잡고 들어온 기억은 난다. 들어오자마자 누군가가 우리를 작은 라커룸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위아래 주황색으로 된 트레이닝 복을 주며 갈아입으라고 했다. 나는 내가 입고 있던 옷을 곱게 접어서 라커 중 하나에 집어넣고, 그들이 준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었다. 


라커룸을 나오자 우리를 라커룸으로 안내했던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안내자라고 소개했다. 우리는 안내자를 따라서 어떤 방에 들어섰다. 컴퓨터가 수만 대 아니 수십만 대, 하여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놓여있는 거대한 방이었다. 컴퓨터 앞에는 주황색 트레이닝 복을 입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모니터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안내자는 우리에게 이 방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원하지 않았지만, 친구는 내 손을 잡고 이 방에 있고 싶다고 말했다.


친구에게 말했다. “여기 좀 무서워.”

친구가 혀를 찬다. “너는 그 우유부단함이 문제야. 그 성격이 너를 도태시킬 거야.”

친구에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 혼자 도태될 수는 없었다. 

“그래. 나도 이 방에 있을게.”


나는 친구의 손에 이끌려 작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친구는 바로 옆 컴퓨터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한참 컴퓨터를 만지던 친구가 갑자기 환호했다.

“여기 내가 좋아하는 게임이 있어. 우리 게임 한판 할까?”

게임은 잘 몰랐지만, 요새 이 게임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구박에 또다시 울컥하여 시작했다. 하지만, 확실히 재미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한참을 즐겼다. 친구는 게임 중간중간 다른 일을 했지만, 나는 게임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신세계였다. 지금까지 왜 안 했는지 억울할 정도였다. 


“정말 재밌어. 왜 이제야 알려준 거야?”

환하게 웃으며 농을 던지는 나를 향해 친구가 또다시 혀를 차며 말했다.

“아직도 게임을 하고 있다니, 정신 좀 차려. 한심해 죽겠다.”


친구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내게 게임을 권한 사람이 친구였다는 사실은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 자신이 몹시 한심하게 느껴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겼던 게임이 갑자기 재미없어졌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컴퓨터를 훔쳐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 중에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들을 하나씩 따라 하기 시작했다. 게임을 할 때처럼 시간이 빠르게 흐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흘러갔다. 나는 내 컴퓨터 안에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집어넣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일에 흥미가 생겼다. 좀 깊이 알아보려고 할 때, 친구가 내게 물었다.

“너 뭐 해?”

당황했다. 아무것도 안 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또다시 친구의 혀 차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어. 작곡.”

“작곡?”

“응.”

“네가?”

“응. 나 옛날에 피아노 쳤잖아. 경험 살리는 것도 좋고.” 

내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그래? 멋있네.” 

멋있다고?! 친구의 칭찬에 내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리고 반드시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 유명한 피아노 작곡가 있잖아. 나도 음악으로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는 그런 작곡가가 되고 싶어.” 

나는 흥분했고, 해야 할 이유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내가 찾던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작곡을 하기 위해서 뭐부터 해야 하는지 찾기 시작했다.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친구한테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컴퓨터를 찾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배웠다. 


그리고 드디어 첫 작품을 완성했다. 기쁜 마음에 친구에서 가장 먼저 보여주었다.

"어때?"

“뭐. 처음이니까.” 친구의 미지근한 반응에 솔직히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친구는 “야, 이거 들어봐. 내가 우연히 발견한 노래인데 정말 좋아. 요새 나 이 사람한테 푹 빠져있잖아.” 친구는 다른 곡을 내게 내밀었다. 전혀 관심 없는 장르의 곡이었다.

"나는 그런 장르 관심 없는데.”

“야, 작곡하는 사람이 이 곡, 저 곡 많이 들어야지. 들어봐. 요새는 이런 곡이 대세야. 음악으로 치유는 무슨, 환상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너는 네 앞가림이나 신경 써.”

친구의 말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쏟아졌다. 나는 친구를 향해 “그럼 너는 뭐 하고 있는데.”라고 소리쳤다. 친구의 모니터에는 저번과는 또 다른 생소한 언어로 가득 차 있었다.

“말하면 네가 알아?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컴퓨터 방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벌떡 일어나는 나를 친구는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았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컴퓨터 방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안내자가 다가왔다.

“다른 방으로 가실까요?”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자는 악기가 가득 차 있는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내가 간절히 원했던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방이었다. 나는 작은 책상 하나를 부여받고, 바로 자리에 앉았다. 내 앞에는 오래전에 손을 뗐던 피아노 한대가 놓여있었다. 정말 행복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의 책상에는 온갖 종류의 악기가 놓여있었다. 고가의 장비도 꽤 보였다. 거기다 그들 주위에는 도와주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불합리했다. 이들과 경쟁해서 절대 이길 수가 없었다. 친구 앞에 당당하게 서야 하는데, 그리고 너는 뭘 아느냐고 따져 물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이겨야 했다. 하지만, 내가 가진 낡은 피아노 한대로는 따라갈 수 없었다. 우선 나는 그들을 돕는 일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돕다 보면 뭔가 하나씩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오랫동안 그들의 곁에 있었지만 내 손에 쥐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갑자기 회의감이 몰려왔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멍 한 상태로 방에서 빠져나왔다. 밖에는 당연히 안내자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발길 닿는 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얗게 칠해진 거대한 문 앞에 섰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방은 온갖 거울로 가득 차 있었다. 거울의 방이었다. 들어가기를 잠시 망설였지만, 악기의 방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밑져야 본전 아닌가. 들어가서 어떤 일이 생기든 겪어보면 될 일이었다. 


나는 지쳐있었다.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모든 거울이 나를 향해 있었다. 오싹했다. 차마 눈을 똑바로 뜨고 거울을 바라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고개를 번쩍 들고 거울과 마주했다. 바로 앞에 있는 커다란 거울 속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누구지? 낯설었다. 내 얼굴이 이렇게 생겼었나? 미술 회화 때 보고 그렸던 그리스 조각상 같은 모습이었다. 눈코입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기억에 혼란이 왔다. 그리고 주황색 트레이닝 복은 뭐지? 나는 옅은 하늘색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친구 손에 이끌려 건물로 들어오던 장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던 장면도 떠올랐다.

"라커룸?! 내 옷이 있는 라커룸으로 가야 해. "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거울의 방 끝자락에 작은 문 하나가 보였다. 본능적으로 라커룸이라고 느꼈다. 거울들을 지나칠 때마다 잊어버렸던 얼굴 형태들이 하나씩 드러났다. 

"맞아, 내 눈은 검은색이었어. 맞아, 내 코는 작고 둥글었지. 그리고 입은, 그래. 옅은 핑크색이었어."

색을 찾아가는 얼굴이 아름다웠다. 나는 입고 있던 트레이닝 복을 벗어서 집어던졌고, 옷을 벗을수록 내 얼굴은 더 선명해졌다. 


드디어 라커룸 앞에 섰다.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한 후,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내 옷이 든 라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빠르게 옷을 꺼냈다. 오랜만에 보는 옅은 하늘색 셔츠와 청바지였다.

“빨리 입고 나가야지.”

옷을 다 갈아입고, 주위를 살폈다. 혹시라도 누가 막고 있을까 봐 걱정했는데, 밖으로 나가는 문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편한 마음으로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낯익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친구야. 저번에는 미안했어. 같이 게임하자.”

친구의 목소리였다. 친구가 나를 다시 부른 것이다. 행복했다. 나는 다시 라커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옷을 벗어던지고, 주황색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었다. 


뒤에서 한 여자의 안타까운 외침이 들려왔지만, 곧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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