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안, 조금 전에 내린 비로 뿌옇게 변해버린 창을 통해 반듯반듯한 건물들이 스치듯 지나간다. 건물에 있는 창 너머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흐릿하게 보인다. 건물 사이사이에는 입가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불현듯, 버스 밖 풍경이 며칠 전에 친구와 보았던 꼭두각시 인형극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형극에서 괴뢰사(꼭두각시를 놀리는 사람)의 움직임이 어땠지?’
나는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올려진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놀리며, 창문 밖 사람들을 내 뜻대로 움직여 보았다. 손가락의 미세한 동작에 맞추어서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입가에 어설픈 미소가 지어진다.
잠시 후, 거대한 건물 옆으로 빨간불에 발목이 잡힌 버스가 멈춰 섰다. 건물의 투명한 창 너머로 역시나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지금 내 새끼손가락보다도 작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데, 고개를 수그리고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누군가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한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번 막의 주인공은 당신이야.’
나는 손가락을 가볍게 놀려보았다.
청년은 후다닥 자신의 자리로 뛰어가더니,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뭉치를 탁탁 두드리며 가지런히 정리한 후, 스테이플러로 꼼꼼히 찍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상사에게 정리된 서류를 조심스럽게 내민다. 그러나 상사는 정리된 서류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가차 없는 손목 회전으로 서류 뭉치를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이 던져 버린다. '스테이플러로 찍어 두길 잘했지, 안 그랬으면 서류 조각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처럼 사무실을 사방팔방 날아다녔겠어.' 청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떨어진 서류를 집어든다.
버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형극의 한 막이 끝난다.
또다시 빨간불에 발목이 잡힌 버스가 이번에는 커피숍 앞에서 멈춰 섰다.
이번 인형극의 장소는 커피숍이 될 것 같다.
커피숍의 거대한 창을 통해 젊은 남녀가 하하 호호 행복한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 보였다. 이번에는 사랑하는 남녀를 주인공으로 정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던 여자가 갑자기 정색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을 살포시 잡고 있던 남자의 손을 세차게 쳐낸다. 남자가 말실수를 한 것이다. 어젯밤 친한 지인과 술자리를 가졌는데, 그 사실을 속인 것이다. 여자는 남자의 이유 없는 거짓말에 화가 났고, 남자는 어제 만난 지인 중 한 명이 여자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깜박한 자신을 한없이 책망했다. 남자가 여자의 손을 부여잡고는 미안하다고 울상을 짓는다. 그러나 쉽게 받아줄 생각이 없는 여자는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 남자는 최소 한 시간 이상 여자의 잔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버스가 덜컹거리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2막이 끝나간다.
이번엔 북적북적한 재래시장 입구 앞에서 버스가 멈춰 섰다. 버스 앞 유리창을 통해 길게 늘어선 차량 행렬이 보였다. 이번 막은 좀 길어질 것 같다.
나는 이번에도 가볍게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하지만, 이번 막의 주인공을 할 특정 인물이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았다. 재래시장 안에 있는 많은 사람을 동시에 움직이기에는 내 손가락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럼, 재래시장을 통째로 움직여볼까? 무대 위에서는 모든 것이 주인공이니까.'
누구 하나 모나지 않게 조화롭게 움직이는 재래시장의 다양한 움직임에 발맞춰서 나의 손가락도 빠르게 움직였다. 누군가의 부모이며 삶의 이유인 이들이 또한 누군가의 자식이며 삶의 이유인 이들에게 피와 땀을 건네고, 건네받는다. 각양각색의 다양한 얼굴에서 드러나는 수많은 감정표현이 재래시장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나는 짧은 숨을 가파르게 몰아쉬며, 손가락 연기에 집중했다.
결국 재래시장 3막도 끝이 났다.
우리 모두는 서로의 손가락에 걸린 끈을 통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내 인생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오만한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내 몸을 엮고 있는 수백, 수천 개의 미세한 끈을 하나씩 발견할 때마다 몸서리가 쳐지지만, 또한 끈이 하나씩 끊어질 때마다 줄 떨어진 인형이 될 것 같아서 두렵기도 하다.
서로에게 연결된 끈이 모두 떨어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문득 든 궁금증이 머릿속을 휘저어 놓았다.
나는 빠르게 달려가는 버스 안, 살짝 열린 작은 틈을 통해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쓸데없는 생각을 날려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바람을 타고 들어온 거미줄처럼 얇고 가는 수천, 수만 개의 끈이 얼굴과 팔, 다리에 다닥다닥 빈틈없이 눌어붙으며 가만 놔두질 않는다. 어느 정도는 걸러내겠지만, 나머지는 그대로 둘 것이다. 다 없애버리면, 세상에서 나의 존재가 사라져 버릴까 봐,...두렵다.
이제 곧 종착역이 다가온다.
종착역에 도착하면 알 수 있을까?
끈 떨어진 인형의 최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