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거울 속의 그들이 당신을 돕기를 원합니다.
* 미혼모 - 여기서 부모는 미혼모를 지칭한다.
"띵동" 오늘도 한 아이가 베이비박스에 놓인다. 차가운 달빛이 으슥한 골목길을 비칠 때 어둠 속의 누군가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놓고 간다. 어둠 속에 종소리만 들릴뿐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베이비박스가 화제다. 베이비박스는 생명의 소중함을 많은 사람에게 알려줬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성경 구절의 말씀처럼 생명은 소중하다. 이 소중한 아이들이 길가에 차갑게 버려져서는 안 된다. 당연하다.
왜? 미혼모들은 소중한 생명을 버릴 수밖에 없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이를 키울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과 아이의 관계를 누구도 알기를 원치 않는다. 익명성을 원한다. 그래서 베이비박스를 찾는다. 세상의 편견 앞에 그들은 두렵다.
왜? 익명성을 원하는가? 사실 이 질문은 그들에게 매우 잔인한 질문이다. 그들에게 자신이 낳은 아이와의 분리는 생각보다 견디기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이와의 관계를 원치 않는다.
한 가지 깊이 생각해 보자. 과연 베이비박스는 엄마와 아이를 위한 최후의 생명보호를 위한 방법일까? 논란의 중심에 선 베이비박스를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베이비박스에 유기된 아동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전국의 아동 유기가 계속해서 베이비박스에 집중된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베이비박스를 좀 더 확장하자고 한다. 법 제정을 통한 합법화를 추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미 지방의 한 교회는 제2의 베이비박스를 설치하였다. 과연 옳은 방향일까?
당연히 생명은 구해야 한다. 생명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무조건 구해야 한다. 하지만 베이비박스에 가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볼 것들이 있다.
그것은 아이를 유기하는 부모와 사회와의 대화의 필요성이다.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양육의 어려움을 이 사회는 외면해서는 안 된다. 상담해야 한다. 먼저 아동을 유기하려는 부모와 대화해야 한다. 베이비박스 시설도 벨이 울리면 직원이 급히 뛰어 나가 부모를 만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베이비박스는 설계 자체가 아동 유기가 먼저이고 그다음이 부모와의 상담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진정으로 베이비박스가 생명을 살리는 수단이 되기를 원한다면, 베이비박스는 생명에 대한 상담이 우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미혼모들이 상담보다는 유기를 먼저 선택한다.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담을 먼저 해야 한다. 이상적인 이야기 일 수 있다. 그들이 상담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이를 놓을 공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들은 '누군가는 아이를 키워줄 것이다. 아이를 직접적으로 버린 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베이비박스 자체의 모순은 시작한다.
베이비박스는 길가에 차갑게 버려지는 아동 유기를 막고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베이비박스에 찾아오는 부모는 아이를 길가에 버리려는 마음보다는 누군가 보호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온다. 만약 처음부터 악한 마음으로 아이를 유기하렸던 사람이라면 베이비박스가 아닌 다른 곳에서 얼마든지 아이를 유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유기하러 온 사람은 최소한 아이의 생명이 안전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그곳을 찾아오는 것이다. 베이비박스를 찾아오는 부모의 마음은 아이의 안전을 우선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동 유기를 할 마음에 없는 부모가 두려움 때문에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놓는 행위는 뭔가 석연치 않다. 만약 '누군가는 아이를 키워 주겠지'라는 기대감과 유기에 대한 타인의 선행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아동을 유기했다면 베이비박스는 본연의 생명 살리기 기능보다 아동 유기의 하나의 창구로 쓰이고 있다는 모호한 결론에 이른다. 베이비박스는 존재 자체가 아동 유기의 창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베이비박스 존재 자체가 의도치 않게 두려움에 갇힌 부모들의 탈출구가 되고 있다. 베이비박스는 고민해야 한다. 미혼모에게 필요한 상담의 영역이 베이비박스 뒤편으로 물러나서는 안 된다. 그들의 두려움을 먼저 상담해주는 공간이 베이비박스보다 그들에게 먼저 제공되어야 한다.
피치 못하게 아이를 키울 수 없는 부모는 아이를 시설에 위탁하면 된다. 미혼모의 시설 위탁의 어려움은 현재 논란이 많은 출생신고의 문제와 미혼모의 익명성 문제 때문이다.
(우선 출생신고의 이야기는 뒷부분에 따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미리 이야기를 하자면, 출생신고의 문제는 보편적 출생등록제도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족 관계의 등록에 관한 법률은 현세대의 다양한 인간관계의 구조를 충분히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에서 지적될 부분은 미혼모가 아이를 위탁함에 있어 아동 보육시설의 아동 접수 과정에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충분한 정보가 없어 두렵기 때문이다.
사실 베이비박스에 넣어진 아이들도 위 상황과 똑같이 대부분 구청을 통해 보육시설로 보내진다. 결국 베이비박스도 아이를 보육시설로 보낸다. 일반적인 아동 위탁과 베이비박스가 다른 점은 베이비박스는 미혼모와 아이와의 관계를 기록에 남기지 않는 기능을 하는 점이다.
베이비박스는 의도치 않게 이 연결고리를 끊는다. 아이와 부모의 삶에 이 연결고리의 부재는 제도적으로 끊을 수 있어도 인생에서는 절대 끊어지지 않는 정신적인 연결고리다. 이들은 이 연결고리를 통해 나중에 서로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국가는 제도적으로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만약 미혼모와 아이가 불가피한 상황에 놓여 있다면, 우선 아이를 보육시설을 맡겨 앞으로의 삶에 대해 상담해야 한다. 만약 상담 후에도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지면 아이를 안전하게 위탁하거나 아이의 입양 과정을 알아봐야 한다.
물론 부모는 이 모든 과정을 원하지 않을 수 있다. 원치 않는 임신 이었고, 원치 않는 아이였다. 그리고 주변의 편견도 무섭다. 익명성 아래 아이와 헤어지고 싶을 수 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자. 최소한 국가가 버려진 아이의 미래를 생각해줘야 하지 않을까? 만약 국가가 베이비박스를 인정한다면 그것은 국가는 그 아이의 권리를 포기하는 일이다.
아이는 최소한 부모가 누구인지 알 권리가 있다. 그리고 먼 훗날 부모를 찾을 수 있는 단서도 있어야 한다. 부모가 성장한 아이를 만나기 싫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는 부모를 알고 싶어 하는 원초적인 욕구가 있다. 이 욕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제도이다.
영화 주노는 10대 미혼모에 대한 이야기다. 10대 미혼모 주노는 원치 않는 임신에 당황한다. 하지만 주노는 아이 생명의 소중함을 안다. 주노는 생명이 온전히 입양 갈 수 있도록 당당하게 출산한다. 그리고 원하는 입양자에게 입양시킨다. 이 과정에서 미혼모 주노는 입양자의 집에 찾아가 자신의 아이를 입양할 사람들을 직접 확인한다. 주노는 세상에 당당하다. 자신이 낳을 아이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주노의 당당함은 아이와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당당함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와의 이별까지 당당한 것은 아니었다. 감정은 당당할 수 없었다. 주노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서럽게 펑펑 운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다. 아이와의 이별은 감당할 수 없는 상실감으로 몰려온다.
미혼모들이 아이와 함께 산다. 그들은 삶을 당당히 꾸려 나가고 있다. 미혼모의 삶은 다룬 영화 미스마마의 3명의 주인공도 사회의 편견과 주변의 편견의 시선을 당당히 이겨내며 사회 구성원으로 잘 살아간다. 물론 쉽지 않은 삶이다. 편견이 가득한 세상에서 그들이 지지받기란 매우 힘들다. 그래도 그들은 당당히 삶을 표현한다.
충분히 출생신고 이후에도 삶을 당당히 살 수 있다. 누가 출생신고 후 삶을 당당하게 못 산다고 말하는가? 그 편견의 말들은 어디서 오는가? 잘 생각해 보자.
베이비박스의 소원은 베이비박스가 사라지는 것이다. 베이비박스의 기도는 이 사회에 아이를 버리는 부모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베이비박스는 아이의 유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부모에게 먼저 말을 건네어야 한다.
베이비박스는 아이를 안전하게 유기하도록 부모를 도와주기 전에 먼저 부모를 만나 부모와 함께 부모의 선택에 대해 상담을 해야 한다. 그리고 먼저 부모를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베이비박스는 부모와 먼저 상담하지 않는다. 벨이 울리면 상담을 하러 달려가지만, 이미 부모는 사라진 후다.
그래서 베이비박스는 부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아이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모순이다.
베이비박스가 아이의 생명을 구하지만 베이비박스는 의도치 않게 아이를 유기하는 부모를 도와주기도 한다. 베이비박스는 아동을 유기하는 부모의 마음을 완화해주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베이비박스는 스스로 모순을 가지고 있다. 베이비박스가 생명을 구하는 것은 사실이나 아동을 유기하는 부모를 돕는 것도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베이비박스에 감동한다. 하지만 그 감동은 유기 순간에 있지 않다. 감동은 아이가 유기된 후 아이를 베이비박스의 상자에서 발견하는 순간에 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문제는 아이의 생명에 대한 위협이 다름 아닌 아이의 부모였다는 점이다. 비극이다.
아동을 유기한 부모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지만 아동을 유기한 주체인 미혼모는 남게 된다. 결국 베이비박스는 아이의 생명을 살린 것일 뿐 궁극적으로 미혼모를 돕는 것은 아니다. 베이비박스는 부모의 유기로부터 아이를 보호할 뿐이다. 하지만 역으로 부모가 아이를 유기하도록 돕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베이비박스는 부모의 유기로부터 아이의 생명을 구한다. 그래서 베이비박스는 가치가 있다. 하지만 베이비박스가 미혼모와 아이 모두에게 가치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베이비박스는 부모의 유기로부터 최소한의 아이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아이는 베이비박스 때문에 생명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베이비박스는 궁극적으로 아이에게 새로운 문제를 안겨준다.
베이비박스는 생명을 말하지만 생명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도 던져 봐야 한다.
아이의 관점에서 보자. 아이의 생명이 살았다. 베이비박스는 아이를 부모의 유기로부터 구했다. 다행이다. 아이가 무슨 죄가 있을까? 아이는 잘못이 없다. 아이의 탄생 조차도 아이 스스로 원한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아이를 버린 부모의 미안함이 아이에게 어떤 답변이 될까? 부모는 아이를 버린 당사자인데...
베이비박스가 아이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을까? 물론 베이비박스가 아이의 미래를 책임질 의무는 없다. 하지만 베이비박스는 아이가 버려진 다음에 있을 아이의 미래에 대해서 고민할 책임은 있다. 아이가 베이비박스 때문에 이곳에 왔기 때문이다.
한국은 과거 수많은 아이가 버려지고 입양되었다. 그들은 어떠한 출생신고도 없었다. 그들은 입양된 후 성장했다. 하지만 성장과 함께 다가온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실로 큰 충격이었다. 아이는 버림 당한 트라우마와 버림 당한 이유를 알지 못해 생긴 트라우마로 고통을 받는다. 자신의 친부모에 대한 원초적인 갈등은 당사자가 아니면 아무도 모른다.
국가는 이들을 외면했다. 생명을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을 아무런 기록 없이 아이들을 입양을 보냈다. 그들의 입양 이후의 삶은 아무도 몰랐다. 성장하여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한국 정부는 이들의 문제를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여길 뿐 문제는 회피하였다. 이들에게 국가가 보장한 문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국가는 책임이 없었다.
이들은 원초적인 부모의 부재에 대한 궁금증과 유기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생 전반을 힘들어했다. 이들은 친부모의 피치 못할 상황에 대한 상상만 있을 뿐 구체적인 사실은 알지 못했다. 마음 뒤편에는 자신을 유기한 부모에 대한 분노도 존재했다. 하지만 애증도 존재했다.
베이비박스는 아이의 알 권리만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다. 베이비박스는 자신의 부모의 상황에 대한 아이의 알 권리이자 아이 출생의 정체성마저도 빼앗을 수 있다. 차라리 아이가 자신의 출생 상황을 명확히 인지 한다면 아이는 나름의 방법으로 상황을 받아 들이며 성장할 수 있다.
아동 유기를 미혼모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아동 유기는 분명 잘못된 행동이다. 범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자. 아동 유기는 그 누구보다 미혼모 당사자에게 제일 큰 상처이자 피해다.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된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우선 미혼모에 대한 최소한의 지원이 절실하다. 그것은 생존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도덕적 잣대나 경제적 잣대로 해석될 일이 아니다. 미혼모의 피치 못할 상황이 오더라도 미혼모가 아이를 국가 시설에 편안히 맡길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미혼모의 어려움에 아동 유기를 먼저 생각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베이비박스는 분명히 표면적으로 아동 유기의 공간이다. 그런데 이 베이비박스가 존재함으로써 아동 유기를 먼저 생각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국가 지원도 아니다. 미혼모가 아무 일도 안 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런 이상적인 사회는 불가능하다. 단지 미혼모들에게 어려운 생존의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이 사회가 돕자는 것이다. 출산 후에도 아이를 양육하더라도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주변의 기본적 지원으로 양육과 일을 병행할 수 있도록 돕자는 것이다.
힘들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힘든 것은 당연하다. 미혼모의 삶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이겨내야 한다. 주변에서 돕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미혼모가 삶이 막막해서는 안 된다. 아무런 지원이 없더라도 삶이 막막해서는 안 된다. 막막하면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된다. 결국 아이마저 포기하고 만다. 사회가 그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 팍팍한 세상에 숨 쉴 수 공간이 제공돼야 한다.
베이비박스 모순에 가슴이 아프다. 엄마가 아이를 유기하지 못하는 공식적인 루트가 있어야 한다. 출생신고도 가족관계 등록법이 아닌 보편적 출생등록제도로 바꿔야 한다. 아이의 출생은 호적이 아닌 아이 출생 등록의 근거로 작성되어야 한다. 미혼모의 가족관계 증명서와는 별도로 한 생명의 출생신고 등록 증명서가 있어야 한다. 공인된 증명서가 별도로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는 성장하여 출생 등록서를 근거로 부모를 찾을 수 있다.
보편적 출생신고 제도가 확립되지 않는 한국에서 보편적 출생신고에 대한 이해는 아직 부족하다. 한국은 출생신고를 가족관계 등록에 관한 법률에 기반을 두어 변화된 현대사회 인간관계 구조에 있어서는 많은 부분 마찰을 빚는다. 현재 한국의 법이 달라지지 못해 한국 사회의 인간관계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최근 들어 불거지는 출생신고의 문제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법이 과거의 문화 속에 갇혀 있기에 새로운 법치의 확립이 필요하다.
현재 아동 유기가 출생신고 문제 때문에 발생한다는 주장은 한국의 가족관계 등록에 관한 법률에 제한된 해석이다. 보편적 출생등록제도가 확립된다면 아동 유기에서 거론되는 출생 신고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현재 아동 유기의 문제는 미혼모의 기록이다. 미혼모의 기록이 미혼모의 가족 관계 증명서에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미혼모의 관계에 법적인 비밀을 보장하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단 아동의 경우는 출생신고에 모의 관계가 반드시 기재되어 아동의 권리를 충분히 보장해야 한다. 이것은 성인이 된 아이가 자신의 출생 내용을 확인하는 기본권이다. 아이가 성인이 된 후 부모와의 사적인 관계가 어떻게 형성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국가는 부모와 자녀와의 기본권은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할 책무가 있다.
한국 사회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 것일까? 베이비박스를 더 늘려서 아동 유기의 창구를 증가시킬 것인가? 아니면 공식적인 아동 위탁 제도의 변화와 출생신고 제도의 변화를 통해 서로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한국은 기로에 서 있다.
만약 대중들이 앞으로 베이비박스를 선택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그 상황을 입법화하려고 한다면 뭔가 시대를 거꾸로 가는 느낌이다. 결국 미혼모가 극복해야 할 모든 편견과 기본권의 부재를 미래 지향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체 부모와 자녀와의 비극을 계속해서 반복시키는 모양이 된다.
베이비박스의 소원은 베이비박스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베이비박스 운영진의 소원이 진정으로 베이비박스의 사라짐이라면 아동을 유기하도록 돕는 베이비박스가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나갈지 스스로 고민해야 한다. 생명의 구함과 생명의 유기를 동시에 행하는 베이비박스의 이중성은 베이비박스 스스로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베이비박스가 아이의 생명을 구하는 목적으로 의도치 않게 부모의 유기를 묵인하고 있다면 베이비박스는 아동 유기의 어두운 그늘을 더 고민해야 할 책임이 있다. 아동 유기의 문제의 원인을 사회 탓으로만 돌린다면 베이비박스는 그들의 소원인 베이비박스의 사라짐에 아무런 사회적 행동도 하지 않는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다. 베이비박스는 이제 제삼자의 평가보다 스스로의 평가를 통해 베이비박스 설치의 책임 있는 행동을 보여줘야 한다.
이제 베이비박스에 대한 논의를 그만하려고 한다. 이제 베이비박스의 문제는 베이비박스 스스로의 고민에 달려 있다. 사람들은 인도적 차원에서 베이비박스를 철거하지 못한다. 하지만 베이비박스에는 점점 아동의 유기 숫자가 집중되고 증가하고 있다. 생명의 소중함 앞에 베이비박스를 누구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없기에 베이비박스 존재에 생기는 스스로의 문제는 이제 베이비박스 스스로 풀어야 한다.
만약 베이비박스가 보편적 출생등록과 입양 특례법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입양 특례법의 개정만을 계속 주장한다면 그것은 분명 베이비박스가 이 세대에 저지르는 크나큰 실수라고 감히 말해주고 싶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출생신고의 개정이 가져올 엄청난 변화에 대해 충분히 연구해야 한다. 스스로의 모순을 풀지 않은 체 출생신고의 문제를 개정하기를 원하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행보이다.
이제 베이비박스에 대한 글은 여기서 정리한다.
앞으로 미혼모들에게 필요한 글들을 작성하려고 한다. 예상치 못한 임신으로 당황한 그들에게 당당히 이 사회의 편견과 아픔을 이겨내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10대 미혼모들, 아이를 키울 수 없는 미혼모들, 그들의 슬픔과 좌절, 그리고 그들의 희망과 꿈에 대해 글을 작성하려고 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아동 유기를 막는 근본적인 방법이다. 이 근본적인 방법이 베이비박스가 말하는 베이비박스가 사라지는 소원으로 가는 길이다.
아이를 버리기 전에 잠깐만 제자리에 서서 세상을 지긋이 바라보자. 당신처럼 아이를 키울 수 없어 아이를 버리려고 했던 당신과 같은 미혼모들의 이야기들이 주변에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란다. 그들은 서로 모여 자신들의 아픔을 이겨내고 당당히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당신처럼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고 있다.
세상의 편견에 짓눌려 베이비박스에 힘든 걸음을 가기 전에 한 번만 고개를 돌려 거울을 보자. 당신과 같은 모습을 한 당신의 거울 속의 그들이 당신을 돕기를 원한다.
현재 당신의 모습이 과거의 그들의 모습이기에 그들은 당신을 충분히 이해한다. 애타는 마음으로 당신을 도와줄 것이다. 베이비박스로 걸어가기 전에 당신의 거울 속의 그들이 당신을 돕기를 진심으로 원한다.
02-322-5007 한국 미혼모 지원 네트워크
02-2693-5007 한국미혼모가족협회
02-827-0033 변화된 미래를 만드는 미혼모협회 인트리
02-3395-9447 건강가정지원센터 미혼모부자 거점기관 (전국 16개 기관)
02-861-3020 서울한부모가족지원센터
129 보건복지부 콜센터 -초보임산부, 임신 출산 진료비 지원-
http://withmom.mogef.go.kr 위드맘 -미혼모자시설 및 공동생활 가정 관련 정보 제공
132 (법률상담) 대한 법률구조공단
1644-7077 (법률상담) 한국 가정법률상담소
02-827-0033 인트리 (미혼모협회)
이메일 intree0501@naver.com
http://cafe.naver.com/20130202pm02
24시간 상담 채널
02-827-0033 변화된 미래를 만드는 미혼모협회 인트리
부산 울산 경남지역 상담
051-412-1205 한국 미혼모 지원 네트워크 부산 울산 경남지부(엄마나무)
053-762-5573 한국미혼모가족협회 대구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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