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News 분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R POST Jul 12. 2016

베이비박스 뒤편에 가려진 우리의 마음

사회적 편견에 대한 우리의 물음? 

감정과 이성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지만 감정 또한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감정에 우선할 때가 많다. 이성보다는 감정이 더 크게 반응한다. 그래서 이성적 설득보다 감정적 설득이 호소력 있다. 하지만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이성적 논의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성적 논의는 가려진 편견을 시간을 통해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문제에 있어 공부하고 연구할수록 우리 사회를 크게 감싸고 있는 무서운 편견에 대해 좌절한다. 그 편견의 크기 때문이다. 좌절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환경을 직시하는 과정이다. 좌절은 무기력함과 무관심을 낳게 한다. 나의 연약함을 바라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의 좌절은 거대한 편견보다 내 안에 존재하는 무기력함이 원인일지도 모른다. 




출생신고 


산모의 익명성을 보장하라는 말이 많다. 특히 입양 특례법의 재개정과 베이비박스의 확산에 찬성하는 대중들의 목소리가 커진다. 특히 최근 방영된 '드롭박스'라는 영화는 베이비박스의 당위성을 잘 보여준다. 생명의 소중함이 세상의 어떠한 법보다 위에 있다는 내용이다. 맞는 말이다. 생명이 법보다 중요하다. 생명이 법보다 당연히 중요하다. 이 부분에 어떤 토를 달 수 있을까? 당연히 생명을 위해 법이 개정되어야 한다. 인간이 있고 법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산모의 익명성은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과연 산모의 익명성이 생명을 위한 것인가?"


출생신고는 국가에 최소한의 출생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당사자의 권리다. 이 권리가 없으면 모든 사회적 권리가 박탈되거나 위험에 처할 경우가 너무나 많다. 예를 들면, 파양의 문제, 무국적자의 문제, 아동매매, 실종 등의 문제이다. 그래서 출생신고는 아이에게 있어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산모에게는 어떤가? 산모는 아이를 통해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기 때문에 산모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출생신고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사실 이 문제는 산모였던 사람들이 오랜 시간을 두고 답변해왔다. 


원래 입양 특례법은 일반인들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입양과 관련 없이 살아가는 일반인들이 입양에 관련된 법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입양기관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와 같이 아이를 산모에게 받아 입양하면 될 뿐이다. 하지만 입양에 관한 특례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일반인도 아니고 입양기관도 아니고 다름 아닌 입양 보냈던 부모들과 입양 간 이들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였다. 


수많은 부모들이 여러 가지 여건 속에서 자신의 아이들을 입양 보낼 수밖에 없었다. 어려웠다. 사회적 편견과 어려운 가정환경, 아이의 장애...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남기고 떠났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그 부모들이 모임을 만들었다. 그리고 입양 갔던 아이들이 외국에서 돌아와 모임을 만들었다. 그 뿌리 찾기를 서로가 원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거쳐 힘겹게 만들어진 법이 바로 입양 특례법이다. 


입양 특례법은 부모와 자녀의 최소한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살아생전에 언젠가는 서로 볼 수 있게 만드는 최소한의 사회 구조망이다. 그들은 자신의 아이를 찾고 싶었고, 그 아이들은 성장하여 자신의 엄마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찾을 수 없었다. 아무런 기록도 없었다. 작은 손글씨의 필체 하나만 보고 부모를 찾기 위해 먼 이국 땅에서 다시 한국으로 왔다. 재외동포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미국에 가서 잘 살고 있던 아이들이 자신의 부모를 찾기 위해 한국에 돌아왔다. 하지만 아무런 기록도 없는 부모를 찾을 수 없었다. 이제는 경제발전으로 살만해진 부모들이 죽기 전에 사죄하는 마음으로 자녀들을 찾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들 또한 찾을 길이 없었다. 그곳엔 상처만 있었다. 



베이비박스? 


생명은 매우 소중하다. 한 아이의 생명을 살리는 일 그것은 매우 귀한 일이다. 하지만 그 생명의 연결고리를 끊는 사회적 편견은 두렵다. 사회적 편견은 미혼모와 아이들을 이별이라는 막다른 길로 내몰고 있다. 


베이비박스는 입양 특례법 개정을 주장하며 생명을 지키는 일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의견에는 보이지 않는 우리 사회의 편견이 숨어 있다. 미혼모들은 많은 부분 사회적 편견을 이기지 못해 아이를 베이비박스에 넣는다. 그것은 생명 경시 풍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이다. 만약 미혼모가 생명을 경시했다면 굳이 베이비박스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아이의 생명을 살리고 싶어 했다. 그래서 베이비박스를 찾아온 것이다. 어딘가에서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잠깐 베이비박스의 문제를 짚어 보자. 

최근에 아동 유기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증가했다. 이 통계가 보여주는 분명한 사실은 아동 유기가 전국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프에서 보듯이 아동 유기 발생의 지역적 분포도를 볼 때 서울 지역과 서울 외 지역의 수치가 급격히 뒤바뀌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 지역에서 발생하는 아동 유기수가 2011년을 시작으로 더 급격히 증가했다. 2011년에서 시작된 서울 지역 아동 유기수 증가율은  2013년에 급격히 증가한다. 왜일까? 아래 그래프를 보면 그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베이비박스를 통한 아동 유기는 2009년 시작으로 2010년에 4명 2011년 36명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베이비박스가 언론에 알려지기 시작한 2012년을 기점으로 베이비박스에 유기된 아동의 수가 급격히 증가한다. 위 그래프의 서울 지역 아동 유기수 증가와 비례한다. 


베이비박스에 아동 유기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한국 사회에 아직도 편견의 벽이 곤고하다는 증거이다. 미혼모들은 자신의 신분을 숨겨 익명성이 보장되기를 원한다. 왜 그럴까? 편견 때문이다. 




생명의 뒤편에 숨은 편견 


익명성을 보장하기 위해 베이비박스 숫자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많은 미혼모들이 '죄송하다'는 편지와 함께 아이를 베이비박스에 넣는다. 마치 30년 전, 엄마들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아이를 입양 보냈던 그때와 변한 게 없다. 


당시 입양기관들은 아동들을 아무런 기록 없이 입양 보냈다. 아동의 미래와 양육에 대해서 전혀 모니터링하지 않았다. 파양 된 아이도 있었고, 학대를 받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무런 기록 없는 입양이 가져다주는 역기능이 그 아동들에게 엄청난 상처로 남게 되었다. 


당시 부모와 아이들 모두 어떠한 연결 고리 없이 생이별을 해야만 했다. 다시 찾을 수도 없었고, 그럴 권리도 없었다. 세월이 흘러 그 연결고리를 찾고자 하는 마음은 눈을 감는 날까지 상처로 남았다. 그저 잘 살고 있으리라 믿는 믿음으로 살았다. 


하지만 성장한 입양 아동들은 이대로 입양이 지속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외국의 삶을 잠시 접어 두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재외동포 국내 거소자 자격'이었다. 그들은 부모와 생이별시킨 입양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최소한의 인권이 보장되는 입양 특례법을 제정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그들의 사회적 편견에 대한 첫 싸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부족하지만 입양 특례법이 제정되었다. 부모와 자녀의 최소한의 연결고리를 사회가 책임지는 시스템이 도입된 것이다. 사회적 편견에 대한 그들의 첫 변화였다. 하지만 2011년부터 어디선가 베이비박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베이비박스는 아이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한다. 또한 "입양 특례법의 출생신고 제도가 미혼모가 아이들을 버리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혼모와 아이들이 힘겹게 만든 입양 특례법과 출생신고가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다. 엄마와 자녀의 연결고리를 생명이라는 이름의 뒤편으로 보내며 미혼모에 둘러싼 편견의 울타리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다.  


과연 출생신고가 없는 것이 미혼모와 아이들을 위한 것일까? 생명을 말하지만 생명 뒤편에 있는 생명을 버릴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의 무서운 편견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사회의 커다란 편견의 벽이 미혼모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장벽이기에 그들이 처한 상황을 내가 쉽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재의 그들이 미래의 그들이 되어 다시금 그 편견을 깨려고 할 때, 결국 그들은 지금의 미혼모처럼 미래의 미혼모에 의해 또 사회적 편견의 벽에 갇히고 말 것이다. 


사회적 편견은 뒤로 숨은 채 미혼모 개인의 문제만은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너무 부끄럽지 않은가? 그들을 향한 성교육, 교육지원, 입양 강요가 과연 그들을 위한 것일까? 뒤로 숨은 편견은 여전히 거대한 벽을 만들고 미혼모와 아이들의 관계를 찢어 놓고 있다.  



편견 앞에 좌절 


사회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편견의 문화 속에 갇힌 한국 사회의 민낯에 대해서는 도대체 왜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인가?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베이비박스에 관심을 갖고 옹호하며 후원한다. 하지만 미혼모를 향한 편견에 대해서는 옹호하거나 후원하지 않는다.


나는 좌절한다. 나의 이성적 사고는 사회의 커다란 편견의 벽 앞에 좌절한다. 바뀔 수 없는 거대한 벽이 나를 손가락질한다. 생명을 모른다고... 미혼모의 실상을 모른다고... 아니다. 난 미혼모를 모르지 않는다. 생명은 더더욱 모르지 않는다. 단지 미혼모를 향한 사회적 편견이 내 눈에는 먼저 보였다. 왜냐하면 현재의 미혼모와 아이들의 미래의 모습은 지금 내 주변에서 미혼모의 편견에 맞서 싸우는 내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Understand different 

HRC 



매거진의 이전글 도시는 역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