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대학시절...
IMF 시절, 대학 신입생들은 민주화 투쟁보다는 현실에 부딪친 취업이 제일 큰 문제였다. IMF을 기준으로 대학생들의 시대정신은 변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민주화 정치가 실현되었고, 어린 시절 88 올림픽을 봤고, 유년시절 최고의 산업 전성기를 지나온 그들은, 그 위 선배들과는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
대학에 입학 후 그들의 가치관은 학번 간의 갈등으로 존재했다. 한쪽에서는 민중가요를 여전히 부르고, 농활을 가고, 한총련의 훈령을 듣었지만 다른 한쪽에는 먹고살기 위해 바빴다. 토익점수를 받아야 했고, 새로운 컴퓨터 언어를 공부해야 했다. 그런 그들은 기존 선배들에게 싹수없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선배들은 그들을 '아웃사이더'라고 낙인을 찍었다.
많은 새로운 대학생 세대들은 정치에는 관심이 적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지나면서, 이미 민주주의는 그들의 숙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아버지의 실업을 보며 취업을 했어야 했고, 상승한다는 등록금에 살 길을 찾아야 했다. 대학만 나오면 취업이 가능하던 시절은 이제 없었다.
386 정치인
최근 모 방송에서 들은 이야기를 보며, 뭔가 옛날로 돌아간 느낌이다. '노인 일자리가 늘어나고 15~60세 고용률이 좋아진 상황에서 40대 실업률은 마음 아픈 부분'이라는 말을 들을 때, 갑자기 옛 생각이 났다.
현재의 실업에 대해 진심 어린 아픔과 정책 변화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뉘앙스와 '인구구조'의 변화라는 변명(?)을 봤다. (이게 왜 변명인지는 비경제활동 인구를 포함하지 않은 그들의 통계 조작 때문이다.) 마치 옛 학과 선배들을 다시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 1987의 감동은 세상을 변화시켰지만, 변화된 세상만큼 그들도 변화가 되었는지 궁금했다.
40대라면, 이제 유아부터 중학교 나이의 자녀를 둔 가장이다. 만약 그들이 실직을 했다면, 이건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단순히 인구구조의 변화로 이 실업률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또한 40대 실업률이 증가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경제 적신호다. 현 40대는 베이비 붐 시대다. 인구구조상 40대는 그 앞뒤 인구구조에 비해 가장 많은 출산율을 자랑한다. 즉 인구가 많다는 이야기다. 그들의 경제적 나락은 인구구조의 변명으로 대체되지 않는다.
386세대는 권력을 향한 끝없는 도전 속에서 결국 그들이 원하는 권력을 쟁취했다. 하지만 정권을 잡은 그들은 마치 IMF 시절처럼 현 40대에게 크나큰 고통을 주고 있다. 또한 그들이 주장한 도덕은 자신들의 집단성과 이념에만 몰두할 뿐, 모두에게 보편성을 띠지 않는다.
거짓말
최근 드러난 청와대 선거개입 사건, 윤지오 씨를 앞세운 보수 언론을 공격했던 사건, 유재수 감찰 비리 무마 사건, 조국 사태 등을 보면, 그들의 도덕성은 어떤 도덕성인지 묻고 싶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만 있을 뿐, 실직적인 도덕성을 기준으로 행동하는 불변의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속이고 은폐하고 뻔뻔하게 갈아 치운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의 거짓말마저 타인을 향한 비판으로 대중을 무마시키고 자신들은 끝까지 정의로운 사람처럼 구호를 외친다.
과연 그들의 거짓말은 어떻게 끝날 것인가?
심지어 경제 통계에서도 그들은 거짓말은 한다. 연일 언론에서 비판하는 실업률 고용률 관계에서 그들은 고용률 증가와 인구구조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현재 경제 정책이 잘 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실업률과 고용률에는
"비경제활동 인구"라는 수를 뺀 통계다. 비경제활동 인구란 '어떤 A라는 사람이 공무원이 되기 위해 노량진에서 시험공부를 하고 있다.'라고 한다면 이 인구는 실업률에 포함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특정 기간에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쉬고 있다면 그 사람은 실업률에 포함되지 않는 비경제활동 인구다. 실질적으로 실업자다. 사실 이 비 경제활동인구까지 포함되어야 실질적으로 체감하는 실업률과 고용률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비경제활동 인구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이렇게 통계를 부분만 보여주는 조작(?)으로 일반 대중을 속이는 정부의 발표들을 보면 그들은 원하는 것만 말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누구를 위한 정의?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
그들의 정의는 악인이 필요하다. 스스로의 정의를 세우기보다는 누군가의 악인을 대항하며 자신의 편을 만들고, 그 편을 기반하여 자신의 입지를 다진다. 그리고 자신들의 정의를 외친다.
그리고 스스로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할 시에는 '대의'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집단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리고 모든 비판의 화살은 음모로 치부한다.
누구를 위한 정의일까?
한 집단만을 위한 정의라면 그 정의는 이미 정의가 아니다. 정의란 보편성을 띠고 있으며 그 보편성을 기반으로 누구에게나 정의롭게 보여야 한다. 만약 그 정의가 이성적인 한 개인의 시각에서 정의롭게 보이지 않는다면, 그 정의는 다시 논쟁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논쟁하기보다는 속이기 바쁘고, '우리 아니면 안 된다'라는 집단의식 속에 똘똘 뭉쳐 상대방을 비난한다.
사람은 실수를 한다. 그리고 과정에서 잘못된 결과를 낼 수도 있다. 하지만 반성하고 수정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것은 파국으로 갈 뿐이다.
과거 대학시절이 생각난다. 엠티를 가서 대가리 박기를 한 적이 있다. 왜 하는지 몰랐다. 학과 활동에 잘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아무런 비판 없이 그 얼차려를 수행했지만, 그 다음날 그 얼차려에 대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난 학과생이기 전에 한 개인이었고, 한 개인으로서 최선을 다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내가 학과에 공헌할 필요는 없었다. 결국 그 조직을 나와 나의 길을 갔지만, 그 이후 난 그 조직을 떠난 사람이 된다.
그들은 한총련의 훈령을 이야기했고, 시대를 바꿔야 한다는 정의감에 여전히 불타 있었다. 하지만 결국 대부분 졸업 후,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고, 밑을 갈구는 꼰대들이 될 뿐이었다. 일부는 아직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정치인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재의 상황에 느닷없이 대학시절이 생각나는 이유는, 지금 상황이 마치 그때의 데자뷔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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