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母-중국父 출생 자녀 이야기
우리 사회에는 평범한 시민들의 눈에 잘 띄지 않고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호종료 아동들이 '눈에 보이는 그림자'라면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는 이들도 있죠. 분명 존재하지만 웬만해서는 눈에 띄지 않아 존재조차 알기 힘든 이들 중 하나가 탈북 여성과 중국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제3국 출신 탈북민 자녀들입니다.
'제3국 출신 탈북민 자녀'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지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북한의 경제난, 식량난이 심해지면서 탈북이 본격화됐습니다. 보통 탈북 여성들은 한국으로 바로 오지 못하고 중국을 경유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보통 신변 안정을 위해 중국 남성과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이 여성들은 중국 현지에서 아이를 낳는데, 이들이 곧 '제3국 출신 탈북민 자녀'에 해당합니다.
보통 중국에서 출산을 한 탈북 여성들은 우리나라로 왔다가 자리를 잡은 뒤 아이들을 국내로 불러들입니다. 아이들은 당연히 한국말과 문화를 전혀 모르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없지만 어머니를 따라 한국 국적을 취득한 채 살게 됩니다. 2018년 12월 기준으로 한국의 초·중·고와 대안학교에 재학 중인 제3국에서 출생한 학생은 2011명에 달합니다.
취재를 위해 서울의 몇몇 교회와 비인가 학교에서 공동체를 이뤄 살고 있는 이들을 직간접적으로 30명 정도 만났습니다.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이들이 극소수여서 전도사나 학교 선생님들의 통역을 거쳐야 했습니다. 대부분이 단답형으로 말을 했지만 몇몇 적극적인 친구들을 통해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제3국 출신 탈북민 자녀'들이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은 정체성 혼란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한국어를 모르다 보니 수업 시간에는 잠만 잡니다. 한국 친구들과는 교류하지 않은 채 중국에 있는 친구들과 위챗 등 SNS로 대화를 하더군요. 유일하게 기댈 곳인 어머니도 생계 활동 때문에 양육에 소홀하다 보니 정서 불안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중국에 아버지를 둔 채 한국에서 새아버지를 만나다 보니 가족에 대한 혼란을 느끼기도 합니다.
취재를 하면서 만난 춘희 양(가명)은 어머니와의 갈등을 겪다 서울의 한 아파트 9층에서 투신을 해 하반신 마비 증상을 겪고 있었습니다. 민철 군(가명)은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습니다. 모두 가정불화 때문이었습니다. 간혹 탈북 여성이 조선인 남성과 결혼한 경우에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뚜렷한 편이었지만 이런 친구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마음의 고향인 중국을 그리워합니다. 하지만 중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채 임시 거주했던 것이라 중국에서도 외국인 신분이고, 비자 발급이 안 됩니다. 중국에 살고 있는 가족이 사망해도 장례식조차 갈 수 없는 것이죠. 정작 그들이 모국으로 생각하는 중국에서도 거부되는 신세입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한국사회의 3등 시민으로 칭하고 있었습니다. 탈북민의 경우 정착지원금 이외에도 ‘북한이탈주민 지원법’에 따라 대학 입학 시 정원 외 특례 입학, 등록금 면제 등 각종 혜택을 받고 있지만 이들은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이런 문제점을 인식한 통일부에서 제3국 출신 청소년을 위한 별도의 전형을 만들라고 각 대학에 권고했지만 제가 취재를 했던 2019년 당시에 별도의 전형을 만든 대학은 단 한 곳도 없었습니다.
국적이 한국인이다 보니 남자아이들은 군대를 가야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남학생들은 말도 안 통하고, 문화도 모르는 나라에서 군대에 입대하는 걸 너무도 무서워했습니다. 군 복무를 피하기 위해 중국으로 밀입국하는 경우도 있더군요. 이때의 이야기를 모아 “제3국서 태어났다고… 우린 3등국민인가요"(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3198003) 라는 기사를 썼습니다.
기사가 나간 이후 반응은 제 예상과는 좀 달랐습니다. '한국인이니 군대를 가는 건 당연한 게 아니냐', '한국인도 어렵고 탈북민도 어려운데 이들부터 도와야 하는 것 아니냐' '중국인을 우리가 도울 필요가 없다' 이런 의견이 주를 이뤘습니다. 맞는 반응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이 아닌 삶을 사는 이들이 한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3등 시민으로 살아가는 현실을 그냥 두고 봐야 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저는 그 사회의 인권 수준은 밑바닥에 놓인 사람들에 대한 대우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사회 내에 2000명이 넘는 이들을 지금 상태로 방치한다면 잠재적으로 사회의 불안요소가 될 것입니다. 반면 이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준다면 우리 사회의 포용력과 약자에 대한 감수성도 한 단계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