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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목 Nov 08. 2022

기분 좋은 변화

2022년 가을, 강릉

같은 작품을 다시 감상하거나, 같은 장소를 다시 방문했을 때 예전에는 눈에 띄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더 나아가서는 감상 자체가 아예 달라지는 순간이 있다. 이처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것들이 있다. 내가 변해서인지, 아님 변했다고 느끼는 대상이 변해서인지와는 관계없이 그 변화가 기분 좋은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순간은 언제나 즐겁다.


경포해변


강릉을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릴 적에 강릉은 내게 큰 인상을 주지 못했다. 기억에 남는 건 경포 해변과 입에 맞지 않았던 초당 순두부, 정신없었던 수산시장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만난 강릉은 그때와는 달랐다. 순두부의 슴슴함과 고소함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어릴 적 기억 속 강릉의 바다는 특별할 것이 없었는데, 이번에 내가 마주한 강릉의 바다는 무척이나 아름답고 다채로웠다. 여전히 정신없는 수산시장도 반갑게 느껴졌다.


강릉에서 앞서 언급한 기분 좋은 변화를 마주했다. 내 어릴 적 기억 속에 강릉은 무색무취의 도시였지만, 이번 여행으로 강릉은 자주 들리고 싶을 정도로 맘에 든 도시로 변모하여 내 머릿속에 새로이 자리 잡았다. 큰 인상을 받지 못한 장소가 다시 방문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장소가 되다니. 얼마나 극적인 변화인가. 시간이 꽤나 흘러 강릉이 변해서인지, 그 시간 동안 내가 변해서인지, 함께 한 사람들의 영향인지, 좋았던 날씨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강릉에서 마주한 기분 좋은 변화는 나를 즐거움 속에 빠뜨렸다.


소돌해변


카메라를 사고 나서부터 놓치기 싫은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셔터를 마구 누르는 습관이 생겼다. 그 순간을 어떻게든 잡아두고 싶어서일까. 아이폰을 산 이후로 카메라 셔터를 누를 일이 많지 않았는데, 이번 여행 동안 오랜만에 셔터를 마구 눌러냈다. 이 순간을 멈춰두고 싶은 아쉬움을 그렇게라도 털어내고 싶었던 걸까.


셔터를 가장 정신없이 눌렀던 곳은 소돌해변이었다. 모래 위에 앉아 시시각각 변화하는 바다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그 모든 변화를 카메라에 담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쉴 새 없이 파도를 보내오던 바다, 그 바다가 들려주는 파도 소리, 손에 쥐어지는 고운 모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한 움큼 쥐어도, 다시 손을 펼치면 손가락 사이로 순식간에 빠져나가버리는 소돌해변의 고운 모래처럼 그 순간이 사라질까 봐 셔터를 연신 눌러대며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와 해변에 앉아있던 친구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동해 바다를 좋아하는 나의 취향도 무의식적으로 행동에 반영된 것 같다. 유난히 맑은 바닷물과 강한 파도 때문일까. 남해 바다와 맞닿은 진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예전부터 제일 끌렸던 건 동해 바다였다.


주문진등대 주변 마을


국내 여행을 할 때 그 지역만의 감성을 경험할 수 있는 곳에 가는 것을 좋아하고, 자연과 시장, 작은 마을이 가장 좋은 예시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고, 시끌벅적한 장소도 좋지만 그 지역만의 냄새를 풍기면서도 한적한 장소라면 더욱 좋다. 부산의 흰여울문화마을, 목포의 서산동 시화골목, 여수의 고소동 벽화마을 모두 기억에 남는 곳이었지만, 주문진등대 주변 마을은 한적해서 더욱 좋았다.


외지인들의 발길이 많이 드나들지 않은 만큼 외부의 냄새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강릉의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는 곳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마을 중간에 서서 눈을 감은 채로 들었던 새소리와 코끝을 스쳤던 바다 내음은 내가 꿈꾸던 시골의 생활을 맛 보여주는 것 같았다. 마음의 치유는 자연과 맞닿아있을 때, 고요함 속에서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을 때 이루어질 수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강릉 브루어리 바이 현


강릉으로 떠나기 전 바다만큼 기대했던 것이 있었는데, 바로 브루어리였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새로운 술을 만나는 순간은 언제나 설레고, 특히 술이 만들어지는 공간과 함께하는 경험은 매우 특별하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여행 중 처음 마주했던 브루어리의 모습과 그곳에서 마셨던 맥주의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그때 기억으로 인해 더 큰 기대감을 가졌던 것 같다.


버드나무 브루어리와 강릉 브루어리 바이 현, 두 곳을 모두 방문했는데 사실 기대가 컸던 곳은 공간의 역사가 길었던 버드나무 브루어리였다. 버드나무 브루어리의 맥주도 충분히 특색 있고 맛있었지만, 곶감, 솔잎, 배, 바질과 같은 독특한 재료의 특색을 잘 녹여내면서도 더 다양한 맛을 보여줬던 강릉 브루어리 바이 현이 더 취향에 가까웠다. 맥주의 맛도 좋았지만, 두 곳 모두 공간이 지닌 힘이 느껴졌다. 이런 곳이 학교 근처에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맥주와 함께 삼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카페 애시당초


쭉 늘어선 바다만큼이나 강릉에서 자주 보였던 것은 카페였다. 강릉이 커피와 카페로 유명하다는 글을 봤을 땐 이 정도까지 많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역시 글만으로는 온전히 경험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는 것 같다.


둘째 날에 방문했던 카페 애시당초가 기억에 남는다. 커피와 디저트의 맛도 물론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카페를 찾는 것은 해당 공간에서의 시간을 소비하러 오기 위함이라 생각하는데, 카페 애시당초는 내게 하루종일 머물러도 질리지 않을 정도의 매력을 지닌 공간이었다. (물론, 커피와 디저트의 맛도 좋았다.) 영화를 볼 때 가장 낭만적으로 다가오는 소재 중 하나는 내가 겪어보지 못한 시대에 대한 그리움인데, 이 공간은 살아본 적 없는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내가 느꼈던 감정만큼은 진실된 것이었다. 옛날 영화의 포스터들과 옛날 물건들로 가득 채운 예스러운 공간은 온라인이 주목받는 시대에도 왜 오프라인 공간이 여전히 필요한지를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주장하는 것 같았다.


경포 해변의 일출, 경포호 앞 코스모스, 강문해변의 갈매기, 주차금지 표지판, 소고기, 그리고 주문진 등대 앞의 나


여행의 이유가 무엇일까. 변화도 중요한 이유겠지만, 일상을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함이기도 하다. 일상의 고민을 잠시 내려놓은 짧은 시간이 삶을 이어나가야 할 이유를 던져주고, 일상에 지친 마음을 환기시켜주며, 다시 어딘가로 떠날 수 있도록 아쉬움을 남겨놓는다.


글을 쓰면서 얼마 전의 여행 속 순간들과 그때의 감정을 떠올릴 수 있어 좋았고, 이 글을 갈무리하며 여행의 감상에서 빠져나와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가야겠다. 다음에 또 떠날 날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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