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도다리, 가을 전어, 겨울 방어, 그리고 여름 몽골
여전히 무더웠던 8월, 올해도 어김없이 본가 근처 횟집에 들러 부모님과 함께 전어회를 먹었다. 오롯이 전어회만 막장에 찍어 먹을 때의 맛도 좋았지만, 나는 뼈째 설어낸 회를 깻잎에 싸서 먹는 그 맛이 유독 좋았다. 깻잎 위에 함께 시킨 회무침 속 야채를 올리고 전어회를 얹은 다음, 막장을 찍은 고추와 마늘을 올린 뒤에 한 입에 먹기 좋게 쌈을 오므린다. 그때가 되면 아버지가 묻는다. 준비가 다 되었느냐고. 잔을 부딪히고 소주를 입 안에 털어 넣은 뒤에 쌈을 입 안에 넣고 쿡쿡 씹는다. 한데 어우러진 여러 재료의 맛 속에서, 고소함과 약간의 기름짐을 품은 전어회의 존재감이 특히 빛난다. 이 쌈이란 무대에서 전어회는 의심의 여지없는 주연이다. 나는 매번 그 쌈을 통해 가을이 올 것임을, 혹은 가을이 왔음을 알아차린다.
늦여름의 전어는 가을 전어보다 기름짐은 덜하나 뼈가 가장 무를 때라 씹기 편해서 좋고, 날씨가 선선해지면서 기름이 더 오르고 뼈가 더 억세진 가을 전어는 콱콱 씹을 때마다 입 안에 스미는 그 녹진한 기름짐이 매력적이다. 늦여름부터 가을은 내게 전어의 계절이다. 그리고 봄에는 향긋하고 보드라운 나물들이, 겨울에는 따끈한 바다내음을 품은 굴전과 기름이 꽉 찬 방어회가 떠오른다. 사시사철 비슷한 맛으로 밥상 위에 오르는 음식들이 있는가 하면, 이처럼 특정한 시기에 특별히 맛이 더 좋은, 심지어 그때만 먹을 수 있는 음식들도 있다. 그 시기를 놓치면, 무려 1년여의 긴 시간을 기다려야만 한다.
적절한 때가 있음을 실감케 하는 것이 어디 음식뿐이랴. 봄의 매화와 벚꽃, 여름의 우거진 녹음, 가을의 단풍, 겨울의 눈꽃. 모두 특정한 때에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이다. 만개한 꽃들은 지고, 나무들은 옷을 바꿔 입다 어느새 벗어버리며, 소복이 쌓인 눈은 결국 녹는다.
아직 20대의 젊은 나이이지만 지금이 아니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심지어는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를 것들을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예전에 비해 자주 고개를 내민다. 제철음식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때, 친구가 했던 말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 만약 우리가 100살까지 산다고 해도, 제철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계절이 이젠 80번도 안 남았으니 이때를 놓치면 안 된다고. 그렇게 생각해 보니, 제철에만 즐길 수 있는 것들의 소중함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사계절이 구분된 때가 얼마나 오래 우리 곁에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영원하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렇기에 그때만 즐길 수 있는 것들을 맘껏 즐겨야 한다.
카메라를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적절한 때의 중요성을 더 강하게 느꼈다. 사진을 찍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피사체다. 찍고자 하는 대상이 없다면 카메라는 쓸모가 없는 물건이다. 나는 길을 걷다가 꽃을 보면 쉽게 지나치지 못하는데, 꽃들은 모두 특정한 시기에만 피어난다. 만개한 꽃을 카메라에 담으려면 짧은 시간 동안만 허락된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꽃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대부분의 순간이 그때만 포착할 수 있는 장면일 수도 있다. 카메라를 든 내게 매번 이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이다. 사진은 빛의 예술이다. 어느 각도로, 얼마만큼의 빛이 피사체를 비추느냐에 따라 사진은 크게 달라진다. 빛이 너무 없는 흐린 날이나, 해가 하늘 높이 떠 있는 대낮에는 좋은 사진을 얻기가 어렵다. 빛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때가 사진을 찍기 가장 좋은 때다. 좋은 재료로 만든 음식은 별다른 조리 과정 없이도 훌륭한 맛을 내듯이, 알맞은 양의 빛이 존재할 때 찍은 사진은 별다른 보정 없이도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될 때가 많다.
여행에도 적절한 때가 있다. 여행의 시기를 잘못 정하면, 그토록 고대하던 여행지의 모습은 만나지도 못한 채로 귀국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여행에 긴 시간을 할애하기가 힘들다. 기껏해야 며칠, 몇 주 정도가 그 낯선 장소에서 허락된 시간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이 보고 싶은 풍경을 보고,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는 여행의 적절한 시기를 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적지 않은 돈과 시간을 들여서 간 그곳에서 찌는듯한 무더위나 살을 에는 듯한 추위, 미친 듯이 퍼붓는 비를 맞닥뜨리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몽골 여행을 결심하게 된 것은 몽골에 다녀온 친구들이 풀어놓은 여행담 덕분이었다. 밤하늘을 뒤덮은 별들과 은하수, 낙타와 말, 광활한 평야. 모든 것들에 마음이 이끌렸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크게 뒤흔들었던 것은 그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의 눈빛이었다. 몽골에서의 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빛났다. 어딘가로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그토록 강하게 든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몇 번의 여행담을 듣고, 몽골을 담아낸 몇 장의 사진을 본 뒤에 마음이 맞는 친구들을 모아 이야기했다. 다음 여름에는 꼭 몽골로 떠나자고.
여름에도 밤이 되면 두꺼운 외투를 걸쳐야 할 정도로 서늘해지는 곳이 몽골이었기에, 여행의 시기로 여름을 골랐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많은 사람이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꿈꾸며 몽골로 떠나는데, 은하수가 가장 잘 보이는 계절도 여름이지 않은가. 여름 몽골 여행은 그야말로 떠나는 시기가 알맞은 제철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