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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목 Mar 24. 2024

토요일은 유난히 짧다

2024.03.09 (토)

아침 일찍 움직여서 하루종일 술을 먹겠다는 것이 원래 그날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며칠간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알람 소리를 듣고 깼던 나는 결국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잠에 들었다. 다시 일어났을 때가 열한 시 반쯤이었나, 날씨는 화창했고, 늦잠을 잔 덕에 정신은 무척 개운했다. 여느 때와 같은 하루를 보내기엔 아까운 날이었다. 몸을 일으킨 뒤에 이부자리를 정리하며 오늘은 정말 특별한 시간을 보낼 것이라는 다짐과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바로 점심을 먹으러 갈까 하다가, 아직 홈플러스에 할인하는 위스키가 남아있을까 하는 생각에 나갈 채비를 하고 우선 마트에 갔다. 나갈 채비를 하는 시간에 그토록 공을 들인 건 오랜만이었다. 특별한 하루를 위해, 오랜만에 머리도 손질하고 입을 옷과 신을 신발도 더 신중하게 골랐다. 


마트에 갔다가 돌아왔을 때가 한시 반쯤이었는데, 제대로 된 점심을 챙겨 먹기엔 애매한 때였다. 대신 저녁을 제대로 챙겨 먹기로 하고, 시장에서 간단히 허기를 달랠 생각으로 중앙시장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청명한 날씨를 온전히 즐기기 위해 월평역까지 걸어가 대전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코스를 선택했다. 우중충하고 흐렸던 날씨를 줄곧 겪은 탓인지, 햇살은 유난히 밝고 따스했다. 마치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와 오랜만에 햇살을 섭취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보드랍게 온몸을 감싸는 햇살과 적당히 찬 기운을 머금었던 바람,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모든 것이 반가웠다. 



중앙시장에 간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는데, 여전히 그곳은 어수선했다. 방문객들과 상인들, 그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차들과 오토바이들, 정말 혼잡했다. 하지만 그 분위기가 싫지는 않았다. 어수선함이야말로 시장이 활기를 띠고 있다는 증거이고, 그것을 맛보러 시장에 간 것이니까. 그리고 허기 때문인지 시장 곳곳에서 풍기는 냄새들이 어느 때보다 진하게 느껴졌다.  


오랜 시간의 공복에 몸부림치던 나의 뱃속을 채워줄 첫 번째 음식으로 정한 것은 떡볶이였다. 며칠 전부터 '싱글벙글 떡볶이'라는 곳에 가고 싶었기에,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아주머니께서 접시를 주시면, 그걸 알아서 채우는 방식이었는데, 허기에 이성을 잃고 떡과 어묵을 마구 담았다. 양념을 잔뜩 머금어 축축해진 김말이도 하나 담고, 고추튀김도 하나 주문했다. 이미 한 번 튀겨진 고추튀김은 달궈진 기름 속으로 들어가 온기와 바삭함을 다시 머금고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아주머니께선 내 접시를 들고 가시더니 김을 마구 뿜어대는 고추튀김과 접시에 담긴 떡, 어묵과 김말이를 리드미컬한 몇 번의 가위질로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주셨다. 그 위에 양념을 몇 번 끼얹으신 후, 내게 접시를 다시 건네주셨다.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양념은 찐득했고 단맛과 매콤한 맛의 비율이 알맞았으며, 떡은 적당히 익혀진 물떡처럼 쫄깃했다. 어묵은 두꺼워 씹는 맛이 있었고, 김말이는 양념에 절여져 축축했으며, 고추튀김은 바삭하면서 아삭했다. 아주머니께서 건네주신 어묵국물로 한 번씩 목을 축이며 정신없이 집어먹다, 접시가 다 비워질 때쯤 급격히 배가 불러왔다.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적당히 퍼라고 하셨던 아주머니의 말씀을 들을 걸' 따위의 생각을 하며 접시를 비운 뒤, 5천 원을 내고, 천 원을 거슬러 받았다. 요즘 시대에 단돈 4천 원에 이토록 내 배를 부르게 할 만한 것이 얼마나 있을까. 허기와 함께 마음도 채워졌다. 


배가 너무 불렀던 탓에 다른 먹거리는 포기하고, 풀빵만 먹기로 결심했다. 아무리 배가 불렀어도 이번 겨울의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를 풀빵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시장 안을 거닐다가 '홍가네 풀빵집' 앞에 이르렀는데, 한 판 조금 넘는 분량의 풀빵이 구워지고 있었다. 먼저 오셨던 노부부께서 거의 8천 원어치를 사시는 바람에, 내게 허락된 풀빵은 천 원어치뿐이었다. 못내 아쉬웠지만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편을 택했다. 풀빵이 남았냐는 질문을 던지고, 이제 남은 반죽이 없다는 답변을 들은 뒤 아쉬운 표정을 보이고 가던 사람들을 보면서 내게 허락된 천 원어치의 풀빵에 대한 감사함은 더 짙어졌다. 


풀빵을 기다리는 시간은 길었다. 옆에 계신 노부부께서 사장님과 나누는 얘기를 듣다, 나도 입을 뗐다. 

"겨울 간식 중에 풀빵을 제일 좋아하는데, 요새 보기가 힘들더라고요."

풀빵들을 다 뒤집은 뒤에, 사장님의 답변이 돌아왔다. 

"풀빵엔 찹쌀 반죽이 들어가는데 그날 못 팔면 다 버려야 해요. 풀빵 한 판 구워서 나오는데 20분 정도 걸리고. 이른 아침부터 나와서 반죽도 만들고 준비도 하는데, 남는 건 얼마 안 되죠. 그러니까 풀빵 장사 시작했던 사람들 중에 금방 포기하는 사람이 많죠. 그래서 보기가 힘든 거예요."


처음 안 사실이었다. 왜 이렇게 풀빵 보기가 힘들까 하는 막연한 생각만 했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품은 많이 드는데 그만큼 남는 게 없으니, 보기 힘든 게 당연했다. 앞으로 풀빵 보기가 더 어려워지면 어떡할까. 내가 좋아하는 것들, 특히 어릴 적부터 좋아해 오던 것들이 점차 자취를 감추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언제나 힘들다. '너와 나의 세대가 마지막이면 어떡해'라는 검정치마의 <Antifreeze> 속 가사처럼,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풀빵이 마지막이면 어쩌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쫀쫀한 풀빵을, 바닷속의 모래까지 녹일듯한 따끈함을 지닌 팥앙금을 품은 풀빵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 


새로운 메뉴를 만드시는 등 나름의 방법을 찾으시려 하시는 사장님을 보며, 조금의 안도감이 들었다. 다행히 이번이 마지막은 아니겠구나 하며. 어느새 풀빵이 다 구워졌고, 3개의 풀빵이 든 흰 봉투를 건네받았다. '풀빵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풀빵을 팔고 계시는 분들이 있어 다행이다'와 같은 생각들을 하며 걷다가, 받아 든 풀빵이 어느 정도 식었을 때쯤 꺼내서 한 입 베어 먹었다. 그 순간 온갖 잡념들은 사라지고, 세상엔 나와 그 풀빵만이 남았다. 그리고 나름의 결론을 내리며 풀빵에 얽힌 사유를 끝마쳤다.

'그런 걱정들을 해서 무슨 소용이람,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에 집중하자. 그래도 먹을 때마다 감사하면서 먹자.'



떡볶이와 풀빵을 먹고 나니 저녁 시간은 가까워졌지만 배는 너무나 불렀다. 하지만 저녁 식사만큼은 제대로 먹어야 오늘의 일정이 제대로 매듭지어질 것 같아, 시장을 빠져나와 무작정 걸었다. 날씨는 여전히 청명했다. 하지만 해가 떨어질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바람은 더 차가워졌다. 부지런히 걸었지만 몸에 스미는 한기를 이겨낼 수는 없었고 목도 말라갔기에, 결국 근처의 카페를 검색해서 찾아갔다. 


'사무실 카페'라는 곳이었는데, 간판은 없었고 건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지도 앱을 켜서 수 차례 더 확인하고 가게 주변을 몇 분째 맴돌고 난 뒤에, 건물 2층으로 올라가 문을 열였다. 문을 열자마자 나는 그 공간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향긋한 커피 향이 물씬 났고, 넓은 창을 통해 푸짐한 햇살이 들이치고 있었다. 카페 내부의 인테리어가 특히 마음에 들었는데, 반복되는 부분이 하나 없이 모든 테이블이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난잡하거나 어수선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키고, 빈자리에 앉았다. 앉자마자 나는 휴대폰을 들고 사진 찍기에 바빴다.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그 공간을 사진으로나마 저장해두고 싶었다. 카페 안 곳곳을 두 눈과 카메라에 담는 것에 열중하던 그때, 커피가 나왔다. 잔마저 독특했다. 이곳은 정말 어느 하나 평범한 것이 없었다.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두고, 가방에서 공지영 작가의 <시인의 밥상>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사람냄새와 말맛이 느껴졌던 글을 읽으며, 혼자 감탄하고 마음에 드는 구절을 만나면 기록하기를 반복했다. 심지어는 책에 실려 있던 박남준 시인의 <성공하지 못했다>라는 시를 읽고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렇게 글에 푹 빠져있던 와중에 익숙한 노래들이 들려왔다. 델리스파이스의 <고백>, 유재하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 이곳의 노래마저 내 취향을 저격했다. 


해는 저물어갔고, 카페 안에 들이치던 햇살은 곧 어둠과 조명의 불빛으로 바뀌었다. 주변의 자리를 채우던 사람들이 떠나고, 새로운 사람들이 빈자리를 다시 채웠다.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변화하던 그 카페 안에서, 나는 주말의 여유로움을 만끽했다. 



마지막 목적지는 카페 근처에 있던 '중국대반점'이라는 곳이었다. 간짜장, 군만두와 맥주, 그것이 원래의 계획이었으나 아직 배가 완전히 꺼지지 않았기에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 군만두는 어림도 없었고, 맥주도 선뜻 주문하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고민 끝에 나는 간짜장과 이과두주를 시켰다. 


투박한 맛의 깍두기를 안주 삼아, 먼저 나온 이과두주를 마시고 있던 와중에 간짜장이 나왔다. 간이 세니까 양념을 무턱대고 다 붓지 말라는 조언을 따라, 양념을 열 숟갈 정도 끼얹은 다음, 면에 양념이 골고루 묻도록 비볐다. 이과두주를 한 모금 정도 들이킨 뒤, 그토록 먹고 싶었던 간짜장을 맛봤다. 간짜장의 정석과도 같은 맛이었다. 면을 비빌 때부터 느껴졌던 간짜장의 이름에 걸맞은 뻑뻑함도 좋았고, 재료의 익힘 정도도 적절했다. 재료가 너무 살아있지도, 너무 죽어있지도 않았다. 짠맛과 감칠맛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양파를 씹을 때마다 은은한 단맛이 느껴졌고, 고기를 씹을 때마다 고소한 맛이 온 입 안에 퍼졌다. 내가 딱 기대했던 맛이 나서, 먹는 내내 얼굴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간짜장을 거의 다 먹어갈 때쯤, 고춧가루를 뿌렸다. 매콤해지고, 더 뻑뻑해진 간짜장은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적절한 맛의 변주였다. 배가 거의 찼을 때쯤, 나는 뒷 테이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서너 분의 할아버지들이 술을 드시고 계셨는데, 충청도 사투리 특유의 느린 템포와 주고받으시는 말들이 너무 재밌었다. 나이는 지긋하셨지만, 우리의 술자리처럼 술부심을 부리고, 서로 한 턱 쏜다고 하면서 투닥거리고,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진한 아쉬움을 표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나와 친구들의 술자리는 어떤 모습일까.' 얼마 남지 않은 건더기와 뒷 테이블의 이야기를 안주 삼아 남은 술을 비웠다.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을 정도로 행복한 하루였는데, 시간이 쏜살같이 빠르게 지나가버린 것 같다. 다른 날들과 같이 일주일을 채우는 하루 중에 하나에 불과하지만, 토요일은 유난히 짧고, 유난히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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