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걷는중 입니다.
첫 생일을 축하해
나의 첫돌이 어땠는지,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사진 한 장도, 흔한 기록 하나도 없었다. 그날을 기억할 만한 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생이 될 무렵, 명절날 고모할머니가 툭 던지듯 들려준 이야기가
내 돌잔치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다.
그날 집에는 미역국이 한 솥 가득 끓여져 있었다고 한다.
누굴 축하하려고 정성껏 차린 상이 아니라, 그냥 먹으라고 끓여둔 국 같았다고 했다.
촛불도, 케이크도, 그 흔한 돌상조차 없었다.
휑한 방 안에 커다란 미역국 냄비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큰고모할머니는 그래도 조카의 둘째 딸인데 첫 생일은 챙겨야겠다 싶어 집을 찾았다고 했다.
그런데 할머니를 맞이한 건 외출 준비를 하느라 바쁜 엄마의 모습이었다.
할머니는 한동안 말없이 집안을 둘러보다가 물었다.
“오늘 둘째 돌 아니냐?”
엄마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대답했다.
“맞아요. 근데 약속이 있어서 나가봐야 해요.”
“애는 어쩌고?”
“미역국 한 솥 끓여놨어요. 이따 애 아빠 오면 같이 먹으면 돼요. 애도 괜찮을 거예요.”
할머니는 할 말을 잃었다고 했다. 가스레인지 위에 놓인 그 국이 대체 누구를 위한 건지,
왜 저렇게 무섭도록 많이 끓여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할머니는 준비해온 선물만 구석에 두고 나왔다고 했다.
그날 집에 남겨진 건, 첫 생일을 맞은 아이와 아무 의미 없는 미역국뿐이었다.
이야기를 듣던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날 엄마는 대체 어디에 간 거냐고.
어른들은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누구 하나 입을 떼지 않았다.
쉽게 꺼낼 수 없는 무언가가 그들의 침묵 속에 고여 있었다.
엄마는 그 무렵부터 자주 집을 비웠다고 한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일주일, 보름, 때로는 한 달 가까이 돌아오지 않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빠의 매질이 시작된 것도 그때쯤이었다.
아빠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싸움은 늘 선을 넘었고,
엄마의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흐르던 장면은 어린 내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았다.
주변 사람들은 ‘잘 살아보려고했던 것같은데...’라고 했다.
잘 살아보려고 애도 써봤지만, 결국 다 말뿐이었다고.
그 무너진 틈바구니에서 나와 언니는 이 집 저 집, 친가 친척들의 손에 맡겨졌다.
그때부터였다. 집이 마음 놓고 쉴 곳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 옮겨가야 하는 곳’이 된 것이.
돌아가고 싶은 장소가 아니라 피하고 싶은 ‘고통스러운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
엄마의 외도와 아빠의 무능한 폭력. 그 벼랑 끝에 내몰린 자식들. 과연 누구의 잘못이 더 컸을까.
여전히 답 없는 질문이 남는다. 그럴 거라면, 대체 자식은 왜 낳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