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도, 나는

아직 걷는 중입니다.

by MSG윤결




나는 아직도 가끔 도망칠 준비를 한다


나는 아직도 가끔 도망칠 준비를 한다.

짐을 싸거나 문을 나서는 연습을 하는 건 아니다.

다만 마음속 어딘가에 늘 출구를 하나 만들어 둔다.

너무 깊어지기 전에 빠져나올 수 있는 길,

너무 기대하기 전에 돌아설 수 있는 거리.


누군가 다정해질수록

나는 그 사람이 떠날 수 있는 이유를 먼저 생각한다.

미리 상처를 예상해 두면

실제로 아플 때 덜 아플 거라고 믿었다.

그건 겁이 많아서라기보다

아프지 않기 위해 몸이 먼저 배운 방식이었다.


나는 늘 최악을 가정하는 사람이다.

계획이 틀어질 가능성,

관계가 어긋날 가능성,

마음이 변할 가능성.

그래서 어떤 순간에도 완전히 기대하지는 않는다.

기대는 종종 실망으로 돌아왔고,

나는 실망을 견디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도망칠 준비를 한다는 건

사실 완전히 머물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군가 내 곁에 오래 있어도

나는 언제든 떠날 수 있게

마음의 짐을 한쪽 에만 걸쳐 둔다.

양쪽에 다 걸면 떠날 때 너무 무거워질 것 같아서ㅋㅋ


나는 삶에서 완전히 도망치지는 않았다.

매번 도망칠 준비를 하면서도 결국은 하루를 살고, 사람을 만나고,

내 몫의 책임을 감당해 왔다.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과 살아내겠다는 선택이

내 안에서는 늘 동시에 존재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무너지기 직전까지는 잘 버티는 사람이다.

아무 일 없는 척 웃고, 해야 할 일을 해내고, 괜찮은 사람처럼 살아간다.

하지만 더는 감당할 수 없을 때가 오면 그때야 비로소 도망칠 생각을 한다.

도망은 나에게 포기가 아니라 마지막 안전장치에 가깝다.


예전에는 이런 나 자신이 못나 보였다.

왜 끝까지 버티지 못할까, 왜 늘 도망갈 생각을 할까.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는 나를 지키는 방식이 조금 달랐을 뿐이라는 걸.


도망칠 준비를 한다는 건 살아남아 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 번도 다치지 않은 사람은 출구를 만들 필요가 없으니까.

나는 많이 아팠고, 그래서 쉽게 다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여지를 남겨 두는 법을 배웠다.


요즘의 나는 예전만큼 자주 도망칠 준비를 하지는 않는다.

출구를 만들되 그 문을 꼭 열어 두지는 않는다.

상황을 끝까지 보고, 감정을 조금 더 견디고,

사람을 한 번 더 믿어 보려 애쓴다.

아직 서툴지만 이전보다는 오래 머문다.


나는 여전히 겁이 있다. 완전히 용감해진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도망치기 전에

“그래도 한 번 더 가볼까”

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나는 아직도 가끔 도망칠 준비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머무를 준비도 조금씩 배우고 있다.

도망치고 싶을 만큼의 삶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로, 오늘의 나는 이렇게 버텨냈다.


영영 이 기 억에서 멀어질 수만 있다면 어디든 괜찮아

무서운 기억과의 이별에서 언젠가는 꼭 이길수 있기를. ..

-윤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