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불안해하지 말아요, 우리
엄마, 나는 어릴 때 엄마가 참 무서웠어요.
단순히 엄해서가 아니라, 엄마가 가진 그 '불안함'이 어린 저에게 그대로 전염되는 것 같아서
그게 참 버거웠던 것 같아요. 엄마는 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 같았잖아요
별일 아닌데도 금방 안절부절못하고, 상황이 조금만 꼬여도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굴곤 했죠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건 엄마의 거짓말이었어요.
사실 대단한 사기를 치려는 것도 아니었잖아요.
그냥 누군가에게 내보이기 부끄러운 상황이 생기면, 엄마는 아주 사소한 부분부터 말을 지어내곤 하셨죠.
"그거 얼마 주고 샀어?"라는 질문에 가격을 속이거나, 가지도 않은 곳을 다녀왔다고 하거나,
사실은 잘 모르는 사람을 아주 잘 아는 것처럼 부풀리는 그런 것들요.
왜 그토록 엄마가 불안했는지, 아직도 잘 몰라요.
옆에서 그걸 지켜보는 저는 늘 조마조마했어요. '저거 금방 들통날 텐데, 왜 저런 말을 하실까.'
그리고 제 예감대로 그 거짓말이 밝혀지는 순간, 엄마는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는 대신 사자처럼 화를 내셨죠. 목소리를 높이고, 오히려 상대방의 잘못을 끄집어내면서 대화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곤 하셨잖아요.
저는 그게 정말 싫었어요. 비겁하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다짐했어요.
나는 절대로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나는 정직하고 당당한 사람이 되겠다고 말이에요.
근데 엄마, 요즘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 아세요?
얼마 전 친구랑 대화를 하다가 저도 모르게 제 형편을 조금 부풀려서 말하고 있더라고요.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그냥 제 모습이 조금이라도 초라해 보일까 봐 겁이 났던 것 같아요.
그러다 친구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을 때, 제 심장이 얼마나 빠르게 뛰었는지 몰라요.
그때 제 머릿속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뭔지 아세요?
'아, 여기서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한다. 어떻게 화를 내서라도 이 상황을 덮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 순간 소름이 돋더라고요. 거울을 보지 않았는데도 제 얼굴이 보였어요.
예전에 제가 그토록 경멸하며 바라봤던, 궁지에 몰려 눈을 부라리며 화를 내던 엄마의 얼굴이 제 얼굴 위에 겹쳐지더라고요.
엄마, 저는 제가 엄마랑은 완전히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요.
엄마의 그 지독한 불안함이 저에게는 오지 않은 줄 알았죠. 그런데 아니었어요.
저는 엄마의 외모만 닮은 게 아니라, 세상이 무서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그 연약함까지 그대로 물려받았나 봐요. 저도 무서웠던 거예요. 남들보다 뒤처지는 게 무섭고, 제 밑바닥을 들키는 게 죽기보다 싫어서,
저를 지키려고 엄마가 썼던 그 서툰 방식들을 저도 모르게 배우고 있었던 거죠.
엄마가 그때 왜 그렇게 화를 내셨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 그건 진짜 화가 아니라,
제발 나를 건드리지 말라고, 나 지금 너무 무섭고 창피하다고 울부짖는 비명이었던 거죠?
그 화 뒤에 숨겨진 엄마의 떨리는 손을 그때는 왜 보지 못했을까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엄마의 그 행동들이 다 옳았다고 말씀드리는 건 아니에요.
저 역시 제 안의 이런 모습들이 싫어서 괴로워요. 하지만 이제는 무작정 엄마를 미워할 수가 없게 됐어요.
미워하는 대신, 엄마라는 한 여자가 그 불안한 세상을 버텨내느라 얼마나 외로운 벽을 쌓아 올렸을지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아려와요.
엄마, 저는 이제 이 굴레를 끊어보려고 해요. 제 안의 불안이 고개를 들 때마다,
거짓말로 숨고 싶을 때마다 가만히 멈춰 서보려고요. "지금 내가 겁이 나는구나"라고 인정하는 게,
화를 내며 나를 감추는 것보다 훨씬 용기 있는 일이라는 걸 이제는 아니까요
내 상황을 숨기고 싶어도 당당하게 사실 대로 이야기하고, 치부와 바닥을 보여줘도 전 괜찮아요,
그게 내 인생인걸요 그냥 창피함을 조금 느끼면 될 거예요, 전 그렇게 진실되게 살아보려고요.
여태껏 숨기고 싶었고 괴로웠던 인생에서 전 벗어날 거예요. 꼭
엄마에게 직접 말로 하진 못하지만 글로 뱉어내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네요.
엄마가 저에게 주신 게 불안함만은 아닐 텐데, 제가 너무 아픈 부분만 들여다보고 살았나 싶기도 해요.
엄마, 우리 이제는 너무 잘 보이려고 애쓰지 말아요. 조금 못나 보여도, 조금 부족해도 괜찮다고 서로에게 말해주지 못했던 그 말들을, 이제는 제가 저에게 먼저 해주려고요.
그래야 나중에 엄마를 만났을 때, 엄마의 그 불안한 눈빛을 제가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불안해하지 말아요, 우리
-윤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