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하나의, 천천히
나의 삶은 대체적으로 고통의 연속이었고, 다정한 삶보다는 무례한 삶이었다.
특히 불행이라는 손님은 꼭 약속이라도 한 듯 한꺼번에 몰려와 대문을 두드린다.
아니, 문을 두드리는 예의조차 생략한 채 내 코앞까지 들이닥치곤 한다.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연쇄적으로 터질 때면, 나는 마치 거대한 수조 속에 갇힌 기분이 든다.
물은 차오르고, 숨이 깔딱 고개를 넘어가기 직전의 그 아찔한 감각.
그 시간을 겨우 지나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나면, 그제야 폐부 깊숙이 눅눅한 안도의 숨이 쉬어진다.
“그래, 이제는 정말 괜찮을 거야.”
젖은 옷을 말릴 새도 없이 스스로를 다독인다. 하지만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안도라는 감정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저 멀리 바다 끝에서 다시 너울성 파도가 일렁인다.
아까보다 더 크고, 더 성난 얼굴을 한 문제들이 다시 나를 향해 돌진한다.
그럴 때면 나는 무력감에 젖어든다. 머릿속은 수만 가지 생각으로 엉키고, 심장은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뛴다.
그 순간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빨리'
이 모든 고통의 터널을 빛의 속도로 통과해 버리는 것. 모든 문제가 마법처럼 해결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완벽한 평화의 상태로 순간 이동하는 것.
때로는 비겁해지기도 한다 누군가 나타나서 제발 이 엉킨 실타래를 대신 풀어주기를,
나는 그저 눈을 감았다 뜨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하지만 마흔하나라는 나이는, 그런 요행이 인생에 흔치 않다는 것을 고통이란 통증으로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이 혼란의 한복판에서 나는 평생 알고 있다고 착각했던 단어 하나를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바로 ‘천천히’라는 세 글자다.
예전의 나에게 '천천히'는 게으름의 다른 이름이거나, 뒤처지는 자들의 변명이었다.
하지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마흔의 길목에서 깨달은 이 단어의 의미가 전혀 달랐다.
"'천천히'는 남들보다 늦게 가는것이 조급한 마음도 아니고,
밀려오는 파도를 넘어가 발밑의 단단한 지면을 먼저 살피는 마음이었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이유는 대개 몸은 현재에 머물러 있는데, 마음은 이미 저 멀리 해결되지 않은 미래의 끝자락에 가 있기 때문이다. 발생하지도 않은 최악의 상황을 미리 상상하며 현재의 나를 채찍질할 때 숨은 막히기 시작한다.
'천천히'는 그 멀리 도망가 버린 마음을 다시 지금 이 순간으로 끌어당겨 앉히는 이미 정해져있던 자리,
"일단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호흡 하나에만 집중하자"는 스스로를 향한 다독거림이다.
성난 파도가 몰려올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파도를 없애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다.
파도의 높이를 가늠하고, 내 몸에 힘을 뺀 채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빨리 해결하려고 허우적거릴수록 몸은 더 빨리 가라앉고 물은 더 많이 마시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힘을 빼고 '천천히' 파도의 리듬을 탈 때,
우리는 비로소 수면 위로 코 끝을 내밀고 숨을 쉴 수 있다.
누군가 대신 해결해 주길 바라는 마음도 내려놓기로 했다.
결국 이 파도를 넘어가며 근육이 붙는 것은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마흔하나, 적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많지도 않은 이 나이에 나는 비로소 완벽한 평화라는 환상에서 깨어난다. 평화는 파도가 없는 잔잔한 호수 같은 상태가 아니다. 몰아치는 풍랑 속에서도 내가 내 숨의 박자를 놓치지 않는 것, 그 소란함 속에서 고요한 중심을 잡는 것. 그것이 진짜 평화였다.
오늘도 여전히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다. 또 다른 너울성 파도가 예고도 없이 밀려올 것이다.
하지만 예전처럼 겁에 질려 머릿속을 복잡하게 굴리지는 않으려 한다.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그리고 내 마음에게 나지막이 말해준다.
"천천히, 하나씩만 하자. 그것으로 충분하다."
마흔하나에 깨달은 이 느릿한 진리가,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파도 앞에서 나를 지켜줄 유일한 구명보트임을 이제는 믿는다.
그러니, 천천히 하나씩,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결하다 보면 분명 끝이 올 거야.
그 끝에서는 행복만 있는 삶이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