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10대 20대는 온통 너였다

나를 믿어준 너 3

by MSG윤결





"미친 거 아니야?"





내 결심을 들은 핼은 충격이었는지 한동안 말을 못 했다.

한참뒤에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며, 기억조차 희미한

그날의 일로 어떻게 그런 무모한 선택을 하느냐고 핼은

나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하지만 날 선 목소리들은 이내 웅웅 거리는 이명처럼 멀어졌다.


나는 그저 도망치고 싶었다. 낯선 현실로부터,

그리고 내 안에서 소리 없이 자라나는 비극으로부터 숨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날 나를 초대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날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돌아온 것은 기다렸다는 듯 터져 나온 불같은 분노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오빠 그날 자기 방에서 잠만 잤어! 너 지금 어디서 딴 남자랑 뒹굴고 와서 우리 오빠한테 덮어씌우는 거니?"


오빠를 범죄자로 몰지 말라며 쏘아붙이는 말들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내 가슴을 헤집었다.

가장 믿었던 친구가 나를 결국 '행실이 불량한 사람취급' 하는 것에 나는 처참히 무너져 내렸다.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렸다.

비를 피할 생각도 못한 채 골목 한구석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빗줄기가 옷을 적시고 살결에 닿아 체온을 앗아갔지만,

그보다 더 시린 것은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는 지독한 고립감이었다.


나는 젖은 바닥에 손을 짚은 채, 쏟아지는 빗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어떻게 그날의 진실은

나만 빼놓고 세상 모든 곳에서 지워질 수 있을까.

억울함과 공포가 뒤섞인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빗속에서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온몸이 젖어 들어가는 것보다,

마음속에 차오르는 절망의 무게가 훨씬 무거웠으니까.

통곡하는 나를 말없이 지켜보던 핼이 다가왔다.

그녀는 젖은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낮게 읊조렸다.


"일단 진정하자.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정말 무엇 때문인지... 들어가서 얘기해."


핼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인근 카페.

따뜻한 온기가 감도는 그곳에서 나는 비로소 잔인한 현실을 직면했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이 가혹한 비밀을 공유한 친구 핼과,

아무도 원하지도 축복하지 않는 내 안의 작은 생명뿐이라는 사실.


카페 안에는 평온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지만, 우리 사이에는 눅눅하고 무거운 침묵만이 고여 있었다.

누가 먼저 입을 떼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정적 속에서,

핼은 젖은 내 손을 조용히 맞잡았다.

그 작은 온기가 전해진 후에야 나는 내가 간신히 살아있음을 느꼈다.


“너의 선택... 나는 존중해.”


핼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해. 우린 너무 어리고, 살아가야 할 날이 너무 많잖아. 괜찮겠어? 세상은 너를 ‘미혼모’라고 부를 거야. 그 시선과 삶의 무게를... 너 혼자 오롯이 감당해야 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낳는다는 결론이 난다면, 나는 내 힘이 다하는 날까지 널 도울 거야”


미혼모. 생소하고도 날카로운 단어가 가슴에 박혔다.

사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임신'이라는 단어를 내 인생의 사전에 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도대체 왜, 어떤 과정을 거쳐 내 몸에 이런 변화가 생겼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내가 아는 진실이라곤 그날 아침 마주한 낯선 남자의 뒷모습과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던 옷가지들뿐이었다.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지독하게 비현실적이었다. 젖은 옷이 피부에 달라붙어 불쾌함을 주지만,

정신은 자꾸만 현실 밖으로 튕겨 나갔다.

마치 누군가 악의적으로 써 내려간 비극적인 소설 속으로 강제로 밀어 넣어지는 기분.


하지만 이것은 꿈도, 소설도 아니었다.

나는 이제 이 비현실적인 진실을 끝까지 품고 갈지, 아니면 세상이 정해놓은 가혹한 이름표를 단 채 홀로 걸어 나갈지 선택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의 끝에서, 나는 결코 예상치 못한 문을 열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를 쓰면서 더 널 생각하게 되는거같아.

그때 넌 나에게 넓은 바다같았어.

나는 니가 참 많이 그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