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10대 20대는 온통 너였다

나를 믿어준 너 2

by MSG윤결




나의 굳어버린 표정을 살피던 핼이 조심스레 물었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마음 깊숙이 묻어두었던 그날의 기억을 꺼내 놓았다.

낯선 침대, 사라진 속옷, 그리고 옆에 누워있던 군복 입은 남자까지. 내 이야기를 듣던 핼의 표정이 복잡하게 얽혔다.


“음... 속옷은 없었지만, 혹시 몸이 좀 이상하다거나... 씻을 때 아프다거나 하진 않았어?”


나는 잠시 그때를 떠올려 보았다.


“아니, 그냥 정신없이 집에 와서 씻고, 머리가 너무 아파서 약 먹고 바로 잤어. 별다른 기억은 없었던 것 같아.”


내 대답에 핼은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다독였다.


“그래, 별일 없었을 거야. 너도 모르게 새벽에 더워서 벗었을 수도 있잖아. 너무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지 말자.”


그 한마디에 꽉 막혀있던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내가 너무 예민했던 거야. 아무 일도 없었을 거야.’


핼의 위로는 마법 같은 힘이 있어서, 나는 금세 안도감에 젖어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오랜만에 마주 앉은 핼은 예전보다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근데 너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걱정스레 묻는 내게 핼은 그저 다이어트를 했을 뿐이라며 짧게 답을 피했다.

대학 생활이 고되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지만, 친구의 마른 어깨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창밖으로 밀려드는 바람이 제법 뜨거웠다. 어느덧 여름이었다. 공포로 점철되었던 그날의 기억은 핼의 위로와 함께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방학과 동시에 나는 집 근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커피 향 가득한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바쁘게 몸을 움직이는 일상은 꽤 즐거웠다. 스무 살의 여름은 그렇게 다시 평범하고 활기찬 궤도 위로 올라온 듯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믿었다.


여름 햇살이 유난히 뜨겁던 어느 날,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핼이었다. 바쁜 탓에 나중에야 전화를 걸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대답 대신 억눌린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괴롭고 힘들다는 말만 반복하는 핼.

나는 앞뒤 재지 않고 택시에 올라 이천으로 향했다.

도착해서 마주한 핼은 지난번보다 훨씬 더 위태로워 보였다. 뼈만 남은 듯 야윈 어깨가 그녀가 견뎌온 시간을 말해주고 있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핼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핼은 얼마 전 임신중절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사랑이라 믿었던 남자친구는 임신 소식을 듣자마자 비겁하게 잠수를 탔고, 혼자 남겨진 핼은 결국 엄마에게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따뜻한 위로가 아닌 서슬 퍼런 정죄였다. 독실한 종교인이었던 엄마는 핼에게

"사탄에 홀려 죄를 지었다"며 불같이 화를 냈고,

핼을 낯선 기도원에 한 달간 가두다시피 했다.

매일같이 기도로 죄를 씻어내야 한다는 강요 속에서,

핼은 지워버린 아이에 대한 죄책감과 엄마에 대한 원망으로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털어놓고 싶었어, 그래야지만 내가 살수 있을것같았어..

그런데 저번에 만났을때 너의 이야기를 듣고 한참 생각하다가 너에게 전화를 건거야. ”


흐느끼는 친구의 곁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난번 만남에서 핼이 꾸었다던

'용 두 마리를 품에 안은 꿈'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그 꿈을 이야기하며 나를 안심시켰을 때,

핼은 이미 혼자서 그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릿했다.


“그럼 그때 그 꿈 이야기... 네 태몽이라서 했던 거야?”


내 물음에 핼은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태몽이었다면 내 품으로 달려들었겠지. 근데 그 용들은 분명히, 아주 선명하게 너를 향해 날아갔어.

그래서 네 꿈이라고 확신했던 거야.”


그 순간, 핼의 목소리가 귀 옆에서 웅웅 거리며 멀어졌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가운 소름이 돋아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설마’ ..... 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안도하며 넘겼던 핼의 위로, 그리고 잊으려 애썼던 그 새벽의 군복 입은 남자.

모든 파편이 하나의 끔찍한 그림으로 맞춰지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핼의 집 근처 약국으로 향했다.

손 끝이 떨려 동전을 떨어뜨리면서도, 무언가에 쫓기듯 임신 테스트기를 사 들고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창밖은 잔인할 만큼 맑았다. 핼은 옆에서 "아닐 거야, 걱정하지 마"라며 애써 나를 다독였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도 불안한 떨림이 서려 있었다.

화장실 문을 닫고 들어간 그 짧은 시간은 평생보다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확인한 하얀 막대 위에는,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하고 붉은 두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토록 믿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 내 눈앞에 놓였다. 핼이 꿨던 꿈속의 용 두 마리는 길몽도, 재물운도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두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을 잔인한 예고장이었다.


선명한 두 줄을 내려다보며, 나는 스무 살의 여름이 이토록 추운 겨울 같을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테스트기의 오작동이라 믿고 싶었던 간절한 바람은

산부인과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산산조각 났다.


“임신 4개월입니다.”


의사 선생님의 무심한 목소리가 비수처럼 꽂혔다. 소름이 돋다 못해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마지막 생리 날짜를 묻는 질문 앞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바보처럼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

돌이켜보니 몸은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 더부룩했던 건 체해서가 아니었고, 쏟아지는 잠은 단순한 피로 때문이 아니었다.

내 몸 안에서 소리 없이 자라나던 또 다른 생명이 보내던 간절한 외침을,

나는 무지함과 두려움 속에 방치해 왔던 것이다.

멍해진 정신을 일깨운 건 의사 선생님의 다음 한마디였다.


“그런데 산모님, 유산 기가 좀 있어요. 아기가 개월 수에 비해 너무 작고, 엄마 상태도 영양실조 수준입니다. 그동안 몸 관리를 어떻게 하신 거예요?”


영양실조.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며 공포와 불안 속에서 보냈던 지난 몇 개월이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진 것 같아 심장이 미어졌다. 부모님께는 죽어도 말할 수 없었다. 이 감당 못 할 진실을 혼자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무게감이 나를 짓눌렀다.


하지만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묘한 고집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나를 배신한 세상과, 나를 지켜주지 못한 그날의 기억, 그리고 축복받지 못한 채 내 몸속에서 작게 웅크리고 있는 생명.

병원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나는 옆에서 내 눈치를 보던 핼에게 떨리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혼자 멀리 떠나서.. 이 아기 낳아야겠어.”




그때 그 시절 나는 네가 없었다면, 저수지에서 발견되었을지도 몰라.

내 손을 잡아주고 믿어줘서, 나는 지금까지 살 수 있었어.

보고 싶다, 내 친구 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