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10대 20대는 온통 너였다

나를 믿어준 너 1

by MSG윤결



스무 살. 우리에겐 각자의 인생이 예고 없이 바빠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서로 다른 대학에 진학한 친구와 나는 틈틈이 문자를 주고받고,

주말이면 약속을 잡아 만나는 것으로 그 시절의 우정을 확인하곤 했다. 대학이라는 신세계는 모든 것이 새로웠고, 잦은 술자리와 끝없는 수다는 새내기였던 나를 매일같이 설레게 했다.

어느 날이었다. 아르바이트가 없던 날, 같은 과 친구에게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오늘 우리 집에서 밤새 술 마시면서 놀자! 부모님 여행 가셨고, 오빠도 군대 가서 집에 아무도 없어.”


학교에서 매일 보는 사이였지만 집으로 초대받는 건 처음이라 조금 어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를 생각해 주는 친구의 마음이 고마워 서둘러 짐을 챙겨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술을 잔뜩 사 들고 마주 앉았다.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들이 안주가 되어 쌓였고,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즐거운 대화 속에 밤은 깊어갔다.

그때였다. 고요한 거실에 친구의 휴대폰 진동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아, 사장님인데... 밤 알바가 늦는다고 잠깐만 매장 좀 봐달라시네. 어떡하지?”


친구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몇 번이나 거절했지만, 상황은 어쩔 수 없어 보였다.

미안해하는 친구에게 나는 괜찮으니 얼른 다녀오라고 등을 떠밀었다.

친구는 금방 올 테니 먼저 자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들어올 때 해장할 거리들을 사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혼자 남겨진 나는 어질러진 술상과 안주들을 대강 치우고 친구의 침대에 몸을 뉘었다.

몽글몽글한 취기와 기분 좋은 피로감이 몰려왔고, 나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새벽의 서늘한 공기에 눈이 떠졌다. 친구가 언제 들어와 잠들었는지 옆자리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무언가 이상한 기운이 전신을 감쌌다.

이불속 내 몸의 감촉이 낯설었다.

분명 친구가 빌려준 잠옷을 입고 잠들었을 텐데. 조심스레 이불을 걷어본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입고 있던 하의와 속옷이 사라져 있었다.

‘내가 잠결에 답답해서 벗었나?’

찰나의 의구심을 안고 침대 아래로 발을 내딛던 순간, 나는 비명을 지를 뻔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침대 바로 옆에는 가지런히 놓인, 혹은 급하게 벗어던진 듯한 군복이 보였다.

공포에 질린 채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확인했다. 그곳에는 친구가 아닌,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남자가 깊은 잠에 빠져 누워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옆에 누운 남자를 흔들어 깨웠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목구멍을 쥐어짜듯

"누구냐"라고 물었다. 잠에서 덜 깬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꿈벅거릴 뿐이었다.

가장 끔찍했던 건 내 상태였다. 왜 내 옷과 속옷이 벗겨져 있는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어떻게 벌어진 건지 추궁했지만, 남자의 대답은 한결같이 무책임했다. "모르겠다"라는 말뿐...


그 짧은 실랑이 속에서 내가 느낀 건 분노보다 앞선 지독한 공포였다.

이 공간, 이 공기, 내 몸을 스치는 이불의 감촉까지 모든 것이 오염된 기분이었다.

속에서 뜨거운 구토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도망치듯 바닥에 흩어진 옷을 주워 입고 그 집을 빠져나왔다.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등 뒤에선 서늘한 정적이 따라붙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머릿속을 수만 번 되감기 해보아도 어젯밤의 기억은 끊긴 필름처럼 군데군데 비어 있었다. 친구가 나간 뒤 잠든 기억,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군복뿐. 그 사이의 공백에 무엇이 있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사이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어제 나를 초대했던 그 친구였다. 하지만 나는 받을 수 없었다

아니, 받고 싶지 않았다. '오빠는 군대에 있어서 집에 올 일이 없다'던 그 명쾌한 목소리가 이제는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가슴에 박혔다.

결국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택했다. 해명도, 사과도, 진실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날의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내 기억 저편으로 욱여넣어졌다. 잊혀 가고 있다고 믿으면서..


몇 개월이 흘렀을까. 어느 화창한 주말, 나는 어릴 적 친구 '핼'을 만나기 위해 이천으로 향했다.

낯선 대학 생활의 소란함에서 벗어나 오랜 친구를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었다.


“점심 뭐 먹을까? 생각나는 거 있어?”


핼의 물음에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수제비를 외쳤다.

우리는 서로의 식성만큼이나 잘 맞는 대화를 나누며 카페로 향했다.

그동안의 대학 생활과 근황들을 쏟아내며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그러다 문득, 마음 한구석에 짐처럼 얹혀 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그 새벽의 일을 이제는 핼에게 털어놓아도 되지 않을까,

입술을 떼려던 찰나였다. 핼이 눈을 반짝이며 먼저 말을 가로챘다.


“맞다, 나 얼마 전에 네 꿈꿨어! 근데 이게 진짜 신기해.”

“내 꿈? 무슨 꿈인데?”

“네가 꿈에서 엄청나게 커다란 용 두 마리를 품에 꼭 끌어안고 있더라고. 이거 완전 길몽 아니야? 재물복이 터지려나 봐!”


신이 나서 꿈 이야기를 들려주는 핼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용 두 마리를 끌어안는 꿈. 사람들은 흔히 그것을 '태몽'이라 불렀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며 등줄기에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즐거웠던 대화의 흐름은 끊겼고, 내 사고는 단 하나의 질문에 멈춰 섰다.


‘그때 별일 없었겠지..? 내가 마지막으로 생리한 날짜가 언제더라 ..?’


달력을 넘기듯 머릿속으로 날짜를 짚어보았지만, 기억은 안갯속에 가린 듯 흐릿했다.

설마 했던 불안이 현실의 무게로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