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지옥에서 넌 꽃이었어.
나의 결정에 그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너무 어렸다. 생의 무게를 감당하기엔,
그리고 내린 결정을 책임지기엔 턱없이 모자란 나이였다.
그것이 내 잘못이든 뼈아픈 실수든, 닥쳐온 현실은 그저 공포였다.
생명을 내 손으로 지워버리는 일만큼은 죽어도 못 할 것 같았다.
병원에서 사실을 확인하고 이미 꽤 많은 시간이 흘러 있었다.
대학교를 다니던 나는 불러오는 배를 감추지 못해 결국 휴학을 선택했다.
'핼'은 내게 작은 원룸 하나를 얻어주었다.
평소 자식에게 무관심했던 부모님은 자취를 하겠다는 내 말에 아무런 의심도, 말림도 없었다.
그 비좁은 방에서 나는 악착같이 견뎠다. 핼은 내가 굶기라도 할까 봐
올 때마다 돈을 쥐어주고 장을 봤다 나르며,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라고 당부했다.
사실 나는 입맛도 없었고 전혀 배고프지 않았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위해 억지로 입에 밀어 넣는 것이 있었다.
비스킷이었다.
병원에 갈 때마다 의사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내뱉었다.
"산모님, 아기가 주수에 비해 너무 작아요. 잘 드셔야 합니다. 운동도 하지 마시고요."
그럴 때면 핼은 내 손을 꼭 쥐며 잘 먹어야 한다고 몇 번이고 나에게 다짐을 받아냈다.
어느 저녁, 일을 마친 핼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가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 같이 저녁 먹자!"
그 목소리에 너무나 설레었다. 하루 종일 혼자 벽만 보고 있던 내게 핼이 오는 시간은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밖에서 기다릴까 싶어 골목으로 나갔다. 왔다 갔다 하며 핼의 차가 나타나길 기다리던 그 순간이었다.
"야, 너 찾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얼어붙은 듯 뒤를 돌아보았다. 그 사람이었다.
내 배를 훑어내리는 그자의 시선 뒤 깊은 한숨이 들렸다.
"진짜 임신했네? 야, 너 때문에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랑 헤어진 건 알고 있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따질 힘도, 마주 서 있을 기운도 없었다.
그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몸을 돌리는 순간, 그자가 내 팔을 거칠게 잡아챘다.
"야! 그 애가 내 애라는 증거 있어?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내 인생을 이 꼴로 만들어!"
순간, 뱃속 깊은 곳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누가 누구더러 할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 오빠에 그 동생이라더니...
전 어디 가서 함부로 몸 굴린 적 없어요. 그리고 제발 나한테 설명을 해줘 봐요!
그날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나도 왜 내가 임신을 했는지 알고 싶다고요!"
"웃기시네, 그걸 누가 믿어? 내 인생 망가뜨린 너,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하...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말 섞기 싫으니까 가세요."
내뱉듯 말을 던지고 집 앞 계단을 두어 칸 올랐을 때였다.
그자가 내 어깨를 뒤에서 강하게 잡아끌었다. 균형을 잃은 몸이 뒤로 확 고꾸라졌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몸이 처박히는 것과 동시에, 배를 쥐어짜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도망치는 그놈의 뒷모습이 보였다.
비겁하게 멀어지는 그 사람을 붙잡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차가운 바닥에 짓눌린 채 내가 할 수 있는 건,
점점 아득해지는 정신줄을 붙잡고 배를 감싸 쥐는 것뿐이었다.
통증은 찢어질 듯 밀려왔고, 멀리서 들려오는 골목길의 정적조차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핼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 누군가 제발 나를 발견해 주기를...
아니, 내 안의 작은 생명만은 무사하기를... 나는 감겨가는 눈을 억지로 부릅뜨며 골목 끝을 응시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대도, 내 선택은 똑같았을 거야.
나는 너 덕분에 살 수 있었어.
네가 아니었다면 난 자신 없었어.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