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10대 20대는 온통 너였다.

신이 있다면 제발 저여자 입을 찢어주세요

by MSG윤결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내 눈을 보지 않았다.





눈을 뜨고 옆을 보니 핼이 있었다.

내 곁을 지키던 핼이 손을 꼭 잡으며 괜찮냐고 물었다.

정신이 들자마자 내 손은 당연하게 배 위를 더듬었다.

아이는, 아이는 괜찮은 거냐고 묻는 내 손등 위로 핼의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다.

핼은 내 눈을 맞추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그 표정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짐작조차 하기 싫었던 상황이 이미 현실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모든 것이 너무나 순식간이었다. 슬퍼할 틈도 없이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의 멍한 정신줄 사이로 담당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원에 왔을 때 이미 하혈이 심했고, 아이는 심장도, 움직임도 멈췄다고..


유산되었다.


회복을 위해 극심한 영양실조로 인해 입원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뒤로하고 나는 몸을 일으켰다.

집에 가야겠다고, 제발 나를 집으로 보내달라고 핼에게 매달렸다.

몸부터 추스르라는 당부와 상태가 나빠지면 곧장 다시 오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뒤로한 채 서둘러 병원에서 나왔다.


아무런 정신이 없었다. 슬퍼할 겨를도 없었고 내 뱃속에 있던 아이가 한순간 사라졌다.

슬픔보다는 설명할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그놈은 비겁하게 도망갔는지,

왜 내 아이는 지켜지지 못했는지..



집에 들어서자마자 화장실로 바로 들어갔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속자꾸 구역질이 멈추지 않았다.

핼이 아직 씻으면 안 된다고 소리쳤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 몸에 닿았던 그놈의 손길, 그 더러운 흔적을 단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씻어내고 싶었을 뿐이다.

일부러 찬물을 튼 건 아니었다.

3월의 공기는 차지도 덥지도 않았지만
물이 살에 닿는 차가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내 어깨를 잡아채던 그놈의 손길이 남아 있을 것 같은 곳을 비누로 박박 문질렀다.

온몸 구석구석.

어딘가 닿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진저리가 났다.

그렇게라도 해야 정신이 돌아올 것 같았다.



욕실에서 나오자 핼이 나를 붙잡으며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왜 쓰러진 거냐고...


나는 핼이 오기 직전 골목에서 벌어진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놈이 나타난 순간부터 내가 바닥으로 고꾸라지던 찰나까지..


핼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골목 어귀에 차를 세우려는데

내가 건물 앞에 쓰러져 있는 걸 보고 곧장 119를 불렀다고 했다.

요즘 자꾸 어지럽다는 말을 자주 해서, 그저 빈혈 때문에 쓰러진 줄로만 알았다고..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며,

핼은 나만큼이나 지독한 분노에 휩싸였다.


그렇게 모든 걸 털어놓고 나니 비로소 현실이 덮쳐왔다.

현실을 느끼고 나니 멍했던 나의 정신 때문에 나오지도 않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보낸 아기에게 너무 미안해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동안 먹고 싶은 것 하나 제대로 먹여주지 못한 게 가슴속 한이 됐다.

딸기가 너무 먹고 싶었지만 비싼 값을 감당할 수 없어 오백 원짜리 딸기 막대사탕으로 달랬고,

삼겹살이 간절한 날에는 편의점 소시지로 끼니를 때웠다.

밥을 챙겨 먹으면 쌀독이 금방 비어버릴까 봐 하루 한 끼로 버텼던 날들.

그 지독한 가난과 나의 현실이 그 어린 뱃속의 아기에게 몹쓸 짓을 했다.


그래도 아이의 태동을 느낄 때면 행복했다.

세상에 나오기만 하면 누구보다 큰 사랑을 주겠노라 매일 밤 맹세했었다.

그런데 그 모든 다짐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절규했다.


핼은 일단 다 잊고 몸부터 추스르자며 나를 따뜻한 바닥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나는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내 몸뚱이가 뭐가 중요하냐고, 지금 그게 문제냐고 소리를 질러댔다.

핼이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내 앞에 무릎을 꿇으며 빌었다.


“제발... 제발 좀 들어줘.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다 알아.

근데 지금은 내가 네 몸부터 챙길 수 있게 제발 도와줘...”


그 간절한 목소리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정신이 아닌 나를 붙잡고 같이 울어주는 핼 앞에서, 나는 무너진 채 멈춰 서 있었다.


‘똑똑.’


누군가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핼은 배달시킨 미역국과 죽이 온 것 같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마주한 건 낯선 50대 여자,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익숙한 친구의 얼굴.

그들을 확인한 순간 나는 잘 잡고있던 정신줄이 툭- 끊어졌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지르며 문밖으로 달려들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오느냐고, 당장 꺼지라고, 당신 아들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하느냐고 악을 썼다.


핼은 괴성과 함께 울부짖으며 달려드는 나를 온몸으로 꽉 붙잡았다.


“가세요! 가시라니까요!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가시라고요!”


핼이 그들을 향해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내 앞의 여자는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내 몰골을 위아래로 훑어내리더니 무심하게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진짠가 보네? 병원에 갔더니 유산되었다길래 진짠가 와본 건데. 어휴, 아까워라. 진짜 우리 새끼면 우리 종손인데, 아까워서 어쩐담.”








신이 있다면, 제발 저 여자입을 찢어주세요. 라고 기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