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10대 20대는 온통 너였다.

진작 알았더라면..

by MSG윤결




나는 나의 일들을 해결하며,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동안

너는 항상 내 옆을 묵묵히 지켜주었다.

나에게 벌어진 일들만 신경 쓰느라, 너는 요즘 어떤지 물어보지도 않았고

너의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지도 못한 채 말이다.


한여름쯤이었나. 핼이 갑자기 밤 드라이브를 가자고 했다.

내일 아무 일정 없으니까 그냥 떠나보는 건 어떠냐고. 밤에 드라이브라니.

너무 신나고 설레는 일이었다. 한참 힘든 일들에 치여 지내다가,

모처럼 홀가분한 마음으로 핼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


밤 10시가 좀 넘었을 때 전화가 왔다.

짐 챙길 거 없냐니까 얇은 겉옷이랑 편한 옷만 들고 나오란다.

대충 챙겨 집 앞에 나가보니 핼이 이미 와 있었다.


"뭐야 뭐야, 우리 진짜 어디 가?"

차에 올라타며 들떠서 묻는 나에게 핼은 "비밀!"이라며 크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우리의 비밀스러운 밤 드라이브가 시작됐다.


그런데 출발하자마자 비가 '투둑, 투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금방 와이퍼가 부러질 것처럼 쏟아부었다.

운전하기 정말 쉽지 않은 날씨였지만, 우린 어찌어찌 강릉에 무사히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보니 바다 파도가 엄청나게 세서 조금 무서울 정도였다.

우산을 하나씩 들고 서서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너무 추워져서 근처 숙소에 방이 있나 물어봤다.

다행히 빈방이 있었고, 우린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이랑 오징어 땅콩을 사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여자 둘이 모여서 뭐가 그리 좋았는지,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고 떠들었다. 정말 행복한 밤이었다.


해가 뜨기 직전, 비가 딱 멈췄다. 창밖을 보니 비 온 뒤라 그런지 구름이 걷히는 하늘이 너무 예뻤다.

우린 숙소 창문에 붙어 해가 뜨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핼

은 슬슬 잠이 온다며 먼저 누웠고, 핼이 잠든 걸 확인한 뒤 나는 바다를 조금 더 보려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바다를 봐서 그런 걸까, 아니면 그동안의 일들이 너무 힘들어서였을까.

그냥 눈물이 막 흘렀다. 멈추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때, 자는 줄 알았던 핼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울어, 괜찮아. 너 좀 울어도 돼. 그러라고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야."


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근데 윤결아, 나는 너한테 참 고마웠어. 사실 그 일들 겪고 있을 때... 나 너 죽는 줄 알았어. 버틸 수 있을까, 이게 사람이 버틸 수 있는 일인가 싶었거든. 근데 네 한마디가 나를 다시 생각하게 하더라."


핼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듯했다.


"네가 그랬잖아. 여기서 힘들다고 죽으면, 먼저 하늘로 보낸 우리 아기한테 너무 미안할 것 같다고. 그래서 악착같이, 더 큰 시련이 와도 버텨야 할 것 같다고... 나 그 말 듣고 순간마다 나약해졌던 내 모습이 참 창피하더라고."


비 온 뒤의 하늘이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핼의 고백은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있던 슬픔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해 주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창밖의 파도는 아까보다 조금 더 잔잔해져 있었고,

나는 그제야 아주 긴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 들었다.


창밖으로 해가 완전히 떠오르는 걸 보고 나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한참을 깊게 잠들었을까, 카운터에서 울리는 전화 소리에 번쩍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3시였다.


"세상에, 3시야!"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허겁지겁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핼이 갑자기 배를 잡고 박장대소를 했다.


"ㅋㅋㅋ 우리 진짜 웃기지 않냐? 살면서 오후 3시에 일어나 본 적이 없는데. 우리 진짜 고단하긴 했나 봐. 아, 갑자기 너무 웃겨!"


핼의 웃음소리에 긴장이 풀린 나도 결국 웃음이 터져버렸다.

엉망이 된 머리로 서로를 보며 한참을 웃고 나니 비로소 어제의 무거웠던 공기가 다 사라진 기분이었다.

핼은 강릉에서 제일 예쁜 곳을 보여주겠다며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근데 핼, 우리 밥부터 먹어야 할 것 같아."


내 말에 핼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소리를 질렀다.


"야! 그 말 진짜 반갑다! 네가 먼저 밥 먹자고 하다니!"


생각해 보니 그랬다. 그동안 내 많은 일들을 쳐내느라,

나는 허기를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밥 먹자는 당연한 말조차 잊고 살았던 내가 먼저 메뉴를 고르자고 하니,

핼은 정말 뛸 듯이 기뻐했다. 메뉴는 따뜻한 순두부로 정했다.


창문을 열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식당으로 향했다.

차 안에는 신나는 노래가 흘러나왔고, 우리의 기분도 노래를 따라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그때, 핼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화면에 뜬 발신인 이름은 이상했다.


'ㅗ ㄱ ㅅ ㄲ'


"응? 저게 뭐야? 이름을 저렇게 저장해 둔 거야?"


내 물음에 핼은 "지금 안 받아도 돼."라며 툭,

수신 거부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곧바로 전화가 다시 울려댔다.

나는 괜찮으니 받으라고 했지만,

핼은 끝내 전화를 넘기며 지금은 받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부르던 차 안의 공기가 순간 무거웠다.

운전대를 쥔 핼의 옆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이처럼 웃던 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묵묵히 내 옆을 지켜주던 핼에게도,



내가 모르는 무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것을...




그때말야, 진작 알았더라면 너를 말렸을거야

그 사람이 너를 죽음으로 내몰게 두진 않았을거야.

그래서 미안해, 나만 매번 나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