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10대 20대는 온통 너였다.

너의 비밀

by MSG윤결



진작 알았더라면 어떻게든 뜯어말렸을 것이다.
네가 누구를 만나든 상관없었다.

그저 그때 네 곁을 세심히 살피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내 미안하고 후회될 뿐이다.




당시 나는 내게 닥친 일들을 수습하느라 억지로 정신줄을 붙잡으며 살았다.

이미 벌어진 일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었지만,

버텨내야 했기에 최대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고 싶었다.

한 번씩 감정이 훅 치밀어 오를 때면 어쩔 수 없었으나,

나름대로 괜찮아질 것이라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간신히 일상을 붙잡고 있는 와중에,

나에게 나쁜 짓을 했던 그 친구와 그의 오빠,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까지 나타나 내 속을 뒤집어 놓을 때면 괴로움은 극에 달했다.

지금에서 되돌아봐도 그날 밤의 일들은 여전히 의문투성이다.


내가 일상을 정상으로 돌리려 무던히 애쓰는 동안,

핼도 나름대로 바쁘게 지내는 듯 보였다.

학원에서 영어 강사로 정식 일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처럼 핼도 잘 살고 있겠거니 짐작하며, 직접 말하지 않는 사생활은 굳이 묻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핼의 친구인 원희 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윤결 씨, 안녕하세요. 저 핼 친구 원희예요."

"안녕하세요, 원희 씨. 잘 지내셨어요?"


안부를 물으며 시작된 통화였지만, 이어지는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요즘 핼 남자친구 이야기 아세요?"

"남자친구가 생겼어요? 저는 전혀 몰랐어요."

"아... 이야기를 안 했구나. 저기, 걔 좀 말려주세요."


말려달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 싶어 귀를 기울였다.

원희 씨의 말에 따르면 핼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친구들과 자주 가던 노래방이 있는데,

그곳 사장이 핼과 몇살 차이가 나지 않는 오빠라고 했다.

단골로 드나들다 사석에서 술자리를 몇 번 가졌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귀는 사이도 아니면서 그 사장이 핼의 집에서 자고 가는 날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핼과 그 노래방 사장은 밤마다 만나는 관계일 뿐,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는 아니라고 했다. 핼은 이 사실을 원희 씨에게 직접 털어놓았고,

원희 씨는 결코 안 될 일이라며 뜯어말렸지만 이미 늦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깊은 관계를 이어가면서도 사귀지 않는 이유를 물으니,

노래방 사장에게는 이미 여자친구가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사장은 곧 헤어질 예정이며, 관계가 정리되는 대로 핼과 정식으로 만날 것이라 했다고 한다.

핼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그건 정상이 아니라며 만류하는 상황이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직접 물어보는 것이 맞을지, 아니면 본인이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맞을지 고민하던 찰나,

문득 핼과 바다로 드라이브를 갔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끊임없이 전화가 울려대던 휴대폰 액정 위로 저장되어 있던 이름,

'ㄱㅅㄲ'. 그가 바로 그 노래방 사장이었을까..?


하지만 이어지는 원희 씨의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노래방 사장의 여자친구는 이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으며,

심지어 두 사람은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무엇보다 친구들이 보기에 그 남자는 핼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가장 아픈 말이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원희 씨에게 물었다.

그는 핼이 그 남자에게 너무 깊이 빠져 있는 것 같으니,

제발 현실을 깨닫게 해 달라며 간곡히 부탁했다.

꼭 좀 도와달라는 원희 씨의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는 끝이 났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핼이 정말 그랬다고? 걔가 그럴 애가 아닌데.'


머릿속에는 의문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핼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고 몇 번이나 되물었지만, 핼은 그저 지금 당장 와달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나는 급히 택시를 잡아 타고 이천으로 향했다.

도착할 때쯤 핼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집 앞 편의점에서 잠시 기다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10분, 20분, 그리고 30분. 핼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조금 더 기다리면 오겠거니 마음을 다독여 보아도 자꾸만 시계로 눈길이 갔다.

결국 한 시간이 지나서야 미안하다는 연락이 왔다.

지금 편의점으로 가겠다는 짧은 메시지였다.

무슨 사정인지 모르겠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싶어 묵묵히 핼을 기다렸다.


멀리서 다가오는 핼의 모습을 본 순간, 나는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

핼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몸에서는 담배와 술 냄새가 짙게 풍겼다.

나를 발견한 핼은 평소처럼 환하게 웃어 보이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자고 손짓했다.

과자 몇 봉지와 맥주, 마른오징어를 집어 들고 계산을 마친 뒤 밖으로 나오는데 핼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나 유산했어. 오늘."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얼굴로 건네는 그 말에 나는 숨이 턱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