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10대 20대 온통 너였다.

by MSG윤결



"제정신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너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내 물음에 핼은 걸음을 멈췄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눈빛이 순간 서늘하게 변했다.


"너는 나를 이해해 줘야지. 당연히 너만은 나를 이해해 줘야지!."

그 말을 듣는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당연하게? 와달라고 해서 왔고, 나는 네가 어떤 말이라도 할 줄 알았어. 그런데 지금 유산했다는 말을 툭 던져놓고, 내가 당연히 이해해 줄 거라 생각했다고? 내가 너의 낙태를 이해해줘야 해?

왜? 내가 그런 일을 당해서?!? "


핼은 가만히 멈춰 서서 눈물을 흘렸다. 내가 너무 심하게 말한 걸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도대체 그 남자는 누구길래 핼을 이 지경까지 몰아넣었는지,

그의 정체가 너무도 궁금했다.


"나... 사실은 아기한테 너무 미안해. 그러고 싶지 않았어. 낙태하기 싫었다고..."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무너져 내리는 너에게 내가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을까.

너무 화가 났지만 일단 휘청거리는 핼을 부축해 집으로 향했다.

집에 가는 길이 이렇게도 멀었나 싶을 만큼 대화 없는 침묵만이 이어졌다.

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 웬 남자가 집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핼은 갑자기 그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네가 여길 왜 와. 가. 가라고. 나 너 보고 싶지 않아!”


핼은 극도의 분노를 얼굴 가득 띠운 채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남자는 나와 핼을 번갈아 쳐다봤다. 누가 봐도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가만히 뜯어보니 제법 반반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얼굴값은 하겠구나 싶었다.

저 뺀질뺀질한 얼굴에 속아 핼이 당했구나, 직감했다.


“아니, 나랑 얘기 좀 해. 네가 해명을 해줘야 한다고.”

남자가 핼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해명…? 이게 무슨 소리야.’

“해명? 내가 지금 걔한테 해명을 하란 거야??”

핼은 목청껏 소리쳤다.

“꺼져. 너랑 할 얘기 없으니까.”


핼은 매몰차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 내 손을 이끌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먼저 이야기하겠지 싶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핼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도대체 왜. 내가 이용당한 건데, 왜 내가 나쁜 년이냐고!”


주방으로 향했다. 나의 입안이 바싹 말라 있었다.

찬물 한 잔을 들이켜며 어떻게든 정신을 붙들렸는데,

뒤이어 들어온 핼이 무표정한 얼굴로 맥주캔을 땄다.

칙,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정적을 깼다.

나는 그녀의 손에서 맥주캔을 뺏어 들었다.


“말해봐. 저 남자는 누구고, 낙태는 또 무슨 소리야.”

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떨궜다.

한참을 망설이다 터져 나온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위태로웠다.


“처음엔 결혼할 여자가 있는 줄 몰랐어. 그저 대화가 잘 통했고, 같이 있으면 즐거웠으니까. 자주 술을 마셨고, 자연스럽게 내 자취방까지 발길이 닿았지. 처음엔 둘 다 술기운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핼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주방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점점 커지는 내 마음과는 다르게 우리 관계는 모호했어. 한 달 내내 매일 밤을 같이 보냈지.

몸의 대화는 지독할 정도로 잘 맞았거든. 그 사람도 나한테 미칠 것 같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용기를 냈어. 이제 우리 제대로 만나보자고.”


잠시 말을 멈춘 핼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 말을 듣자마자 그 사람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라.

자기는 진지한 사이는 딱 질색이래. 지금처럼 지내는 게 좋다고…

나는 그 사람에게 시간이 필요한 줄로만 알았어.

하지만 그날 이후 연락이 뜸해지더니, 새벽마다 찾아오던 발길이 뚝 끊기더라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앞에 앉아 있는 여자가 내가 평생 알고 지내온 그 '핼'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오질 않으니까, 견딜 수가 없어서 그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로 달려갔어.

근데 그 사람은 없더라. 텅 빈 카운터에 앉아있는 여자한테 사장님 언제 오시냐고 물었지.

그 여자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며 누구냐고 묻길래, 바보같이 당당하게 말했어. 여자친구라고.”


핼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여자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더라. 자기가 그 사람과 결혼할 사람인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그 차가운 목소리를 듣는데 심장이 발밑으로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어. 그때 알았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핼은 빈 맥주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전화를 했어. 안 받더라. 미친 사람처럼 전화를 걸고, 제발 설명 좀 해달라고 문자를 쏟아부어도 끝까지 침묵하더라고. 그 지독한 수신음만 듣고 서 있는데 문득 깨달아졌어.

아, 나를 사랑을 한 게 아니라 몸을 이용당한 거구나.

그 사람한테 나는 딱 그 정도였구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 밖으로 비어져 나오는 말이 단 한 마디도 없었다.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묵묵히 핼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핼은 한참을 하염없이 울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그 사람을 믿었던 것 같아. 친구들은 이용당하는 거라고 그랬지만

분명 그 사람은 여자친구랑 헤어지고서라도 나한테 올 사람이라고 믿었던 것 같아..."

핼의 말들이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 이상

말들을 더 들어봐야 했다.


"그렇게 연락이 끊기고 한참 뒤에야 생리를 두 번이나 건너뛰었다는 사실이 떠올랐어.

떨리는 손으로 테스트기를 사다 확인해 보니 임신이더라.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그 남자한테 솔직하게 말했지. 임신했다고. 그랬더니 그제야 연락이 오더라고.

지우라고, 돈 줄 테니까 당장 병원 가자고."


핼은 맺힌 눈물을 닦아낼 기력도 없는지 멍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그 사람이랑은 죽어도 같이 가기 싫었어. 그래서 동창한테 부탁해서 남자친구인 척 같이 가달라고 했어.

수술실 들어가기 전에 그 남자한테 문자 하나를 남겼어.

'결혼할 여자도 있다면서, 나랑 그런 짓 한 거 네 여자친구도 아느냐'라고.

그렇게 보내고 수술실에 들어갔어."


이야기를 듣는 내내 가슴이 불난 것처럼 무언가 확 끓어올랐다.


"동창이 집까지 데려다주고 죽도 사다 줬는데, 그러더라.

내 핸드폰으로 계속 전화랑 문자가 온다고. 알고 보니 그 여자가 내가 보낸 문자를 본 모양이야.

그래서 나와 그 남자의 관계를 다 알아버린 거지. 그 여자한테도 연락이 오고 난리가 났어.

오늘 혼자 있으면 정말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아서... 그래서 너한테 연락한 거야."


순간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참았던 화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나는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너, 너 진짜...!"


핼은 일어서는 내 손을 필사적으로 꽉 붙잡았다.

"제발... 제발 욕해도 좋아. 그런데 나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 감정을..."


도대체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뒤통수가 화끈거리는 전율을 느꼈다.

이어지는 핼의 고백은 믿기 힘들 정도로 처참했다.


"그런데도... 나 그 사람이 너무 좋아. 그 여자 버리고 나한테 오면 좋겠고, 나를 다시 안아주면 좋겠어. 나 그 사람 품에 안기고 싶어... 이런 내가 미쳤다고 해도 할 말 없지만, 이 감정이 뭔지 정말 모르겠어."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너 미친 거야. 지금 그 사람한테 철저히 이용당한 걸 알면서도,

네 몸 버려가며 수술까지 해놓고선 그래도 좋다고? 너 진짜 제정신 아니야!"


내뱉고 나니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몸정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건가 싶었다.

이미 핼은 그 남자에게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배당하고 있었다.

내가 평생 알아온 핼은 온데간데없고, 미친것 같은 여자가 앉아있었다.


"그런데.. 내가 나쁜 년은 아니잖아, 내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

그 여자가 그러더라고, 임자 있는 남자한테 뭐 하는 짓이냐고.

여자가 작정을 하고 꼬시려고 달려드는데 어떤 남자가 안 참겠느냐고

그 남자가 그 여자한테 그랬데. 그러면서 그 여자가 나한테

욕정에 안달이 났으면, 다른 곳에 가서 해야지 왜 더럽게 남의 남자한테 그러냐고...

자기들 사이 이렇게 만든 나쁜 년이라고 그러더라.."


핼은 이야기하는 내내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의 20대가 이토록 무서울 줄은 아무도 몰랐다.

나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더는 들을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러 터미널 가는 택시를 탔다.




내가 가장 후회되는 게 뭔 줄 알아?

널 끝까지 말리고 그 남자한테서 멀어지게 했어야 했다는 거야.

나는 끝까지 그러질 못했잖아.

그 사달이 날줄도 모르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