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인문극장 2019 공연 #2
[Synopsis]
어린 시절 홀로 상경해 갖은 고생을 거쳐 마침내 교사가 된 준식은 아홉 번의 실패 끝에 당첨된 아파트에 입주한다. 힘든 시기를 지나 그가 그토록 꿈꾸었던 안정된 직장과 집을 얻게 된 그 때, 십여 년 간 만나지 못했던 그의 이복동생 민우가 집으로 온다. 준식 가족은 민우와 다소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다. 준식의 아내 미숙은 민우와 점차 가까워지며 자연스럽게 민우와 준식을 비교하게 된다. 준식은 그동안 힘들게 꾸렸던 자신의 안정된 삶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연극 <녹천에는 똥이 많다>에는 '수족관'이 중요한 오브제로 등장한다. 그리고 무대 또한 수족관처럼 연출되어 마치 인물들 또한 수족관 안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녹천에는 똥이 많다>에서 수족관을 둘러싼 다양한 의미는 무엇이며, 그것이 지금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려 한다.
갖은 고생 끝에 준식과 미숙 부부는 서울 변두리 녹천에 23평짜리 아파트의 1층집을 장만한다. 드디어 ‘진짜’ 집에 왔다며 기뻐하는 미숙은 끊임없이 그 집을 쓸고 닦으며, 집안을 어떻게 꾸밀지 고민하며 살아간다. 그중 그녀의 로망은 ‘수족관’이다. 미숙은 거실 한쪽에 커다란 수족관 하나를 놓으면 좋을 것 같다며 준식에게 수족관을 하나만 사다달라고 부탁한다. 미숙의 계속된 부탁에도 불구하고 준식은 수족관을 사다주지 않고, 시간이 지나 민우가 집에 들어오게 되면서 더 이상 집 꾸미기는 미숙의 관심사가 아니게 된다.
그토록 그녀가 원했던 수족관은 ‘으레 다른 사람들이 하듯이’ 집을 꾸미고 싶었던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집을 꾸미는 그녀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생각 때문이 아니라,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하기 때문에 수족관을 갖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미숙은 수족관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준식과 매우 비슷한 노선을 걸어왔다. 둘은 각자의 신념이나 주관과 같은 ‘까닭 있는 삶’을 살기보다는 남들과 비슷한 삶, 혹은 겉보기에 멀쩡한 삶을 꾸리기 위해 몸부림쳐왔다.
그러나 이러한 미숙의 삶은 현실과 동떨어진 민우가 집으로 들어오면서 완전히 뒤바뀐다. 그녀도 존재조차 몰랐던 준식의 이복동생 민우의 등장이 처음엔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민우와 함께 머물며 과거의 낭만을 돌아보고, 그가 쓴 시를 듣고, 현실에 맞서는 정의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이 무언가 어긋났다는 것을 깨닫는다. 거대한 쓰레기 퇴적물 위에 쌓아올려진 그들 아파트의 실체처럼, 그녀의 삶 또한 겉보기에만 멀쩡했을 뿐, 안정적이고자 애쓰고 있었을 뿐, 진짜 자신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때부터 그녀의 관심사는 수족관으로부터 멀어진다. ‘더 이상 수족관을 갖고 싶지 않다.’의 수준이 아니라 아예 그 존재와 그에 관한 욕망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즉, 더 이상은 먹고 살기 위한 혹은 사회적인 가족상을 실천하기 위한 삶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것이다.
준식은 안정적인 삶을 위해 발버둥 쳐왔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늘 어려웠지만, 학교 급사로 일하며 야간대학을 졸업했고, 끝내 교사가 되었다. 어릴 때는 엄마가 하는 빵 도둑질을 도왔고, 교사로 일을 하면서는 부당한 보너스를 조금씩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가 원했던 것은 단 두 가지였다. 먹고 사는 것. 그리고 안정적인 삶을 꾸리는 것. 이를 위해 그는 어느 정도 양심과 도덕을 외면해왔고, 누구보다 열심히 달려왔다. 결국 그는 서울 외곽에 23평짜리 아파트에 당첨되면서 그 꿈을 차근차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그는 아내 미숙으로부터 아파트를 꾸미기 위한 수족관을 부탁받는다. 그러나 그가 억지로 꾸린 안정적인 삶에는 계속해서 발버둥 쳐야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바쁘게 앞만 보고 달리는 그에게 미숙의 로망을 위한 수족관을 사는 일 따위가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었고, 당연히 수족관은 그의 삶에서 늘 뒷전이었다. 그러나 동생 민우가 집에 머물게 되면서, 미숙의 관심사는 민우로 쏠리게 되고, 불안감을 느낀 준식은 뒤늦게 아내가 원하던 수족관과 가장 싼 금붕어 몇 마리를 사서 집으로 향한다.
수족관을 사서 집으로 향하는 그의 길은 험난하다. 서울 외곽인 녹천에 있는 그의 집은 수족관을 산 곳으로부터 너무 멀었고, 지고 가야 할 수족관은 너무나도 컸다. 그러나 미숙의 낌새가 심상치 않다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그는 등에는 커다란 수족관을 지고, 한 손에는 봉지 안에 든 금붕어를 들고 집으로 향한다. 땀범벅이 되어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배가 아프다. 준식은 똥이 마려웠지만, 계속해서 질주하는 지하철에서 내릴 수도 없고, 이 많은 짐들을 들고 화장실에 가기도 서글퍼서 얼른 집으로 가서 해결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는 똥을 살짝 지리고, 사람들은 슬금슬금 준식을 피한다.
그 고생을 하고 지고 온 수족관인데, 미숙의 반응은 시원찮았고 봉지 속 금붕어도 이미 죽어있었다. 갖은 굴욕감과 고생을 한 결과가 이렇다니, 준식은 허탈감을 숨길 수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결국 수족관은 집에서 찬밥 신세가 된다.
그렇다면, 준식이 뒤늦게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부랴부랴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미숙과의 사랑이었나? 혹은 지금까지 꾸려온 안정적인 가정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나? 이는 아마 후자에 더 가까울 것이다. 애초에 연극 내내 이 부부 사이에는 ‘사랑’과 같은 감정적 교류가 보이지 않았고, 결혼 초반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애초에 크지 않았던 사랑을 지키고자 함이라기보다는 미숙이 떠남으로써 생길 수 있는 결과, 즉 자신의 가정이 무너질까봐 생긴 두려움 때문에 급히 수족관을 사왔을 것이다.
이러한 준식의 방식은 지금껏 그가 살아왔던 방식과 유사하다. (자신이 직접 세운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세워진 ‘생존과 안정’이라는 목표를 지키기 위해 그때그때 눈앞에 닥친 문제들을 해결해왔던 그는 미숙과의 문제 또한 곪아서 터질 때까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가 안정이라는 최종 목표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급히 다잡아보려 한 것이니까. 그러나 이미 다른 삶에 눈을 뜬 미숙에게 이러한 얄팍한 노력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고 끝내 이 가족은 산산조각난다.
의미보다는 생존이나 겉보기에 치중한 삶, 그를 위해 포기한 양심들. 명백히 준식의 삶은 뭔가 잘못되었다. 그러나 누가 그런 준식에게 손가락질 할 수 있는가? 준식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 것은 결코 준식 개인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수족관을 중심으로 드러나는 준식과 미숙의 삶은 그 당시 사람들의 욕망(아파트와 안정적인 삶, 그리고 생존)이 어떠한 형태로 있었는지 알게 해준다. 그러나 그 형태가 다를 뿐, 앞만 보고 달려가는 지금 우리의 삶과 그 속내는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고 사회가 정한 규격에 맞지 않으면 마치 낙오자가 되는 것처럼 느끼는 것도 지금의 실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당시의 준식도, 지금의 우리도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노력은 무조건적인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열중하는 것, 그리고 노력하는 것은 꽤나 가치 높은 행위임에도 우리는 그것을 엉뚱한 곳에 낭비하기도 한다. 다른 이들과 엇비슷하게 살기 위해서,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때로는 진짜 중요한 가치를 놓치면서 열중하고 또 열중한다. 그렇게 사는 삶의 끝에는 잔인할 정도로 느껴지는 허탈감만이 남을 뿐이다. 누구보다 노력하고 살았던 준식이 실은 진짜 삶으로써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것처럼, 그래서 진탕 술을 마시고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이렇게 살면서 산다고 말할 수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