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제 살인사건은 살인의 추억 이래로 어느덧 한국형 범죄 스릴러의 단골 소재가 된 것만 같다. 범인을 끝내 잡지 못하고 처연함에 물드는 k-스릴러는 할리우드에서 그 형식을 역수입할 만큼 나름의 매력이 있는 장르'였'다.(사견입니다) 그러나 지나친 클리셰의 남발은 한국 관객을 지치게 했고, 우리는 더 이상 공권력의 무능함과 한국 형법의 허점, 시민 의식의 부재를 마주하고 싶지 않다. 안 그래도 삶이 팍팍한데 왜 이런 일갈까지 들어야 하는가?
<암수살인>은 이 같은 한국영화의 지형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다. 형편이 여유로워서 용의자의 무리한 금전적 요구를 들어줄 수 있고, 지속적인 도발에도 결코 이성을 잃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하는 형사, 또 이 형사를 훼방 놓지 않고 협력하는 담당 검사까지. 클리셰의 전복이다. 고어한 묘사에 쓸데없는 노력을 들이지도 않아 덜 자극적이고, 인명을 중시하는 메시지도 곁들였다. 캐릭터가 신선한 것도 알겠고, 그저 그런 킬링타임용 영화가 아니란 것도 알겠다. 하지만 뭔가 부족하다. 숭고한 인물을 묵묵히 따라갈 뿐인 카메라, 다소 우연에 의존할 뿐인 서사...
이 영화의 밋밋한 이야기에 유일한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플래시백이다. 송경원 평론가의 글에 따르면 플래시백들 중 환상도 있고 진실도 있는데, 둘 사이의 기법적 차이가 전혀 없어 관객이 스스로 구분하게끔 유도한다는 점에서 플래시백의 훌륭한 용법이라고 하였다. 난 동의하기 어렵다.
형민(김윤석)은 실증 없이 태오(주지훈)를 범죄자라 확신하고 그의 번잡한 증언만을 의지하며 수사한다. "쟤 사람 잘라본 놈 맞다. 그게 아니면 진술이 저렇게 구체적일 수 없어."라는 형민의 증언은 몇 번을 들어도 얄팍한 근거다. 특히나 아무리 형편이 넉넉해도 터무니없는 금전적 요구를 들어줘야 하고, 감형을 유도할 수 있는 리스크까지 있다면. 여기서 플래시백은 태오의 범행 및 전사를 보여주며 형민의 확신을 관객의 확신으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단지 이뿐이라면 효과적 용법이라 할만하지만... <추격자>나 <황해>에 비해 덜 자극적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지언정 가해자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살인 행각에 대한 직간접적 묘사를 플래시백으로 보여준 이상 <암수살인>이 선택한 용법은 비윤리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부족한 개연성을 '사실 기반'이라는 단서로 메꾸기는커녕 설령 의도는 좋았다고 해도 자기 현시적 테크닉으로써의 플래시백이 삽입되어 피해자 유가족에 할애하는 러닝타임의 의미는 퇴색된다. 오히려 '사실 기반'이 실제 사건의 유가족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레퍼런스 차용이라는 패착인 것이 밝혀져 비난을 받은 바 있다.
형민이 스스로 밝혔듯 태오와의 게임에서 그는 전혀 잃을 게 없다. 피해자 및 유가족의 안녕이라는 숙원 사업의 사명 아래에서 유일하게 형민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던 직업윤리마저 무색해지고, 태오의 실없는 육두문자만이 뇌리에 남는다. 기획 의도와 형식은 어긋나고, 갈등 없는 세계의 밋밋한 판타지는 아쉬움을 남긴다. 한마디로 아쉬운 실패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