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살인. 하나는 짙은 폭력성을 불특정 인간에게 분출한 청년의 살인이고, 또 하나는 그 청년의 사형 집행이다. 첫 번째 살인의 피해자는 중년의 택시 기사로, 시종일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인간으로 묘사된다. 그래도 소위 '죽을 짓'을 한 것은 아니다. 손님을 능욕하고, 딸뻘 여자에게 치근덕대고, 산책 중인 개를 향해 클락션을 울리며 이런 행위들을 즐기는 불쾌한 인간일 뿐이다. 다시 한번 짚는다. 이 자는 죽어 마땅한가? 물론 절대 아니다. 그런데... 그게 영화 속에서라면 조금 얘기가 다르다.
행인에게 시비를 걸고, 다리 밑으로 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청년. 카페에 앉아 줄곧 소지하던 밧줄을 손에 휘감더니 밖에 나와 택시를 탄다. 알고 보니 그 불쾌한 기사의 택시다. 인적 드문 곳으로 접어들 무렵... 청년은 밧줄로 기사의 목을 옥죄고 기사는 저항하며 클락션을 울린다. 청년은 밧줄을 좌석에 묶고 앞자리로 가서 둔기로 기사의 손을 내려친다. 행위의 반복. 기사가 기절하며 냄새나는 틀니가 바닥에 처박힌다. 천으로 기사의 얼굴을 가리고 호숫가로 끌고 간다. 그때 기사가 꿈틀대더니 이내 살려달라며 발버둥 친다. 짱돌로 기사의 얼굴을 내려친다. 살인이 마무리됐다. 살인 행각의 묘사는 구체적이다 못해 유려하다.
동물 사체의 이미지로 시작한 영화는 곳곳에 죽음의 모티브를 배치하고, 누리끼리한 필름 화면과 프레임 가장자리의 암부는 불안감을 더한다. 별다른 이벤트 없이 약 30분간 각 인물의 묘사가 번갈아 점층 되어 가는 동안 관객은 지루함과 동시에 일말의 기대감을 느낀다. 뭐라도 벌어지겠지... 그 무엇이 바로 '첫 번째 살인'이다. 솔직히 영화라는 허구 속 불쾌한 택시 기사의 죽음이 내 가족, 내 이웃의 죽음과 동일시되지 않는 건 다들 동의할 것이다. "살인까지 바란 건 아니었다"라고 변명해봤자 의미 없다. 우리는 이 영화의 톤 앤 매너가 만든 폭력 이미지의 매혹을 부인할 수 없다.
재판 과정을 과감히 생략하고 청년은 사형 판결을 받는다. '두 번째 살인'이 벌어지기 전 청년은 변호인에게 가정사를 털어놓는다. 관객은 이 시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청년의 이름이 '야체크'라는 걸 알 수 있다. 딱한 사연을 읊기는 해도 앞서 보여준 사이코 살인마로써의 면모를 그저 방황하는 불행한 젊은이로 탈바꿈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오히려 역효과일 수도.
살인의 묘사는 다시금 구체적이다. 형식적인 기도를 올리는 사제, 울부짖는 청년, 교수형 밧줄에 목이 걸린 사체, 바닥에 떨어지는 변. 사형 집행이 완료됐다. 재차 묻는다. 청년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혹은 청년의 죽음을 동정할 수 있겠는가?
단지 '십계'가 모티브라고 해서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이 '살인하지 말라'는 공허한 외침의 시각화에 그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형 제도의 실효성과 구체적 과정을 둘러싼 논의의 양상은 이 영화와 하등 관계가 없다. 스스로의 감상에 대한 경계와 숙고만이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