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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꽁치의 맛 Apr 13. 2021

<시계태엽 오렌지> 키치인 듯 키치 아닌 키치 같은

악의 관점에서의 선순환


영화를 보고 떠오른 단어는 키치 kitsch였다. 영화 전반을 아우르는 미장센과 과장된 제스처가 그러하고, 또 주제 의식을 돌출시키는 방식과 그것이 유도하는 함의가 그러하다. 그러나 한편 쿤데라의 정의에 의한 키치를 고찰해보면 정반대로 이 영화가 비-키치라는 생각도 든다. 열려있는 여러 가능성 중에 한 가지를 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키치를 정의하는 수많은 방법 중 가장 단순한 층위에 놓인 것은 영화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팝아트들이다. 마약 섞인 우유가 뿜어져 나오는 조각상의 젖꼭지, 우스꽝스러운 베토벤 코스튬 등. 압권인 것은 고양이 할머니의 남성기 조각상이다. 둔중한 물체가 흐느적거리는 형상만큼이나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소유자인 할머니의 태도이다. "그 물건이 얼마나 귀한 건데!" 나아가 큐브릭의 놀라운 선곡 능력이 돋보이는 베토벤 9번 교향곡, Singin' In The Rain의 전복적인 사용, 패거리만의 조잡한 슬랭, 빨리 감기를 이용한 편집 등은 총체적으로 부조화를 이뤄 관객을 일정 거리 밖으로 밀어내 주인공 알렉스를 관찰하기를 유도한다.



알렉스의 비행은 친구들의 배신으로 막을 내리고, 감옥에서 그는 아첨과 가식을 배운다. 머지않아 영화는 ‘루도비코 실험’을 제시하며 자유를 원하던 알렉스가 실험 대상을 자처한다. 실험의 실체는 약물을 주입한 채 눈이 감기지 않도록 눈꺼풀을 고정하고 폭력과 섹스 영상을 강제로 관람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평소 알렉스가 좋아하던 베토벤 9번 교향곡이 흘러나와 그에게는 폭력, 섹스, 그리고 베토벤 9번 교향곡에 대한 원초적 거부감이 주입되었다.

실험을 마치고 난 뒤 알렉스는 그의 과오에 대한 보복과 수난을 거치고 역 루도비코 치료를 받는다. 실험을 주도한 내무부 장관은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포퓰리즘을 위해 거래하자고 제안을 건넨다. 자유 의지를 되찾고 끝내 악을 선택하고야 말 거라는 인상은 영화의 마지막 샷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빅토리아 시대의 의상을 입은 군중들 사이, 눈밭에서 나체로 여성과 뒹구는 알렉스의 모습은 청량하다 못해 서늘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결말이 새삼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영화 중반부에 이를 때 알렉스의 친구들이 재등장하며 결말과 비슷한 종류의 아이러니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렉스의 카리스마에 눌려 눈치를 보던 그의 패거리는 시답잖은 독재자를 함정에 빠뜨리고 범죄 망에서 벗어났었다. 수년이 지나 알렉스의 눈앞에 그들은 경찰이 되어 나타난다. 시나리오 구성상의 아이러니로 여겼을 때도 충분히 흥미롭지만, 파시즘의 교활한 면모를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결말과 유사한 맥락이다.



이 영화가 키치 같은 이유

루도비코 실험을 통해 사적 범죄행위보다 공권력에 의한 파시즘적 범죄행위에 주안을 두어 선과 악의 단순한 이분법적 구분을 회의하고 자유 의지의 중요성에 대한 철학적 담론을 제시하는 듯 하지만, 직관적으로 매혹되기 쉬운 폭력과 섹스 이미지의 전시와 함께 이를 종종 정당화하고 희생자들을 희화화하는 알렉스의 내레이션 및 카메라의 시점은 어떤 식으로든 존재 이유를 정당화하기 어려워 보인다. 키치인듯한 전반부와 키치 아닌 중반부의 미학적 인과가 부족한 만큼 그럴듯한 개똥철학을 전면에 내세워 자기 현시적 테크닉의 존재 이유를 변명하는 키치 같은 영화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영화가 비-키치 같은 이유

그러나 <시계태엽 오렌지>는 우화적 구성을 경유해 알렉스와 제도권의 폭력이 결탁하는 결말에 이른다. 쿤데라식 정의에서의 키치는 존재에 대한 무한한 긍정, 즉 인간의 유한성을 부정하는 부풀어진 ‘보편적 공감’에의 매몰이다. 자의식에 도취된 미성숙한 자아에게는 이 영화가 내면의 악을 북돋고 범죄를 조장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고, 반면 큐브릭이 요구했듯 알렉스를 타자화하여 관찰했다면 악이 배양되고 은밀히 뿌리내리는 현실의 풍자를 탁월하게 여길 것이다. 어찌 되었든 파시즘에 대한 비판 의식은 영화가 개봉한 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결론

결국 이 영화가 키치인지, 비-키치인지 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다. 생전의 큐브릭에게 위증할 시 루도비코 실험형을 처한다고 고한 뒤에 무슨 생각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냐고 인터뷰하지 않는 이상, <시계태엽 오렌지>가 어떤 태도를 견지했는지 모를 일이다. 다만 의심 가는 점은 주연배우 말콤 맥도웰의 인터뷰 중 “난 알렉스를 연기하며 한 번도 즐긴 적 없다.”는 말이다. 왠지 구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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