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앞에 봄이 얼쩡거리고 있다
엊그제가 청명(淸明)이었다. 하늘이 차츰 맑아지기 시작하는 절기라고 한다. 입춘이니 경칩이니, 어렸을 적 학교에서 24절기를 배울 때나 엄마가 은행에서 가져온 달력에 조그맣게 쓰인 절기를 볼 때면 좀 촌스럽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어쩐지 사랑스럽게 여기게 됐다. 한자와 전통이 오히려 이국적이고 특별하게 다가오기도 하거니와,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찾아드는 작은 변화를 세심하게 알아채 1년을 24등분이나 구분해놓은 것이 아름다웠다. 자연의 품 안에 꼭 싸여서, 자연과 함께 발맞춰 살아가는 것 같아서.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해가 갈수록 아까워진다. 더 이상 커가는 게 아니라 노화에 들어섰다는 것을 인식하고서부터 그렇다. 겨우 이십대가 되어서 늙었다고 푸념하려는 것은 아니고, 내게도 노화와 죽음이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달까.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면 삶을 더 아낄 수 있다는 라틴어 문구에 조금 더 진심으로 공감하게 된다.
그래서 계절 하나도 허투루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여름은 특히. 재작년에는 여름을 끝내주게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커져서, 여름용 디지털 기록장까지 만들어 팔았더랬다. 6, 7, 8월 동안의 생활을 기록하는 ‘일지’와 여름을 더 깊게 즐기도록 돕는 질문과 제안을 담은 ‘문답’으로 구성한 다이어리였다. ‘문답’에 넣을 질문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다가올 여름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기대하게 됐는데, 덕분에 그해 처음으로 정동진독립영화제와 한강 수영장에 놀러 가는 등 여름의 낭만을 잔뜩 즐길 수 있었다.
올해도 3월이 되자마자 여름에 무엇을 하면서 보낼지 고민하려고 했다. 그런데… 여름은 아직 멀었고, 코앞에 봄이 얼쩡거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여름만 편애하지 말고 봄도 아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4월과 5월을 그저 여름 직전의 계절로 퉁쳐서 무심히 지나쳐 버리지 말자고.
4월에 무엇을 하면 좋을까. 여름에 뭘 하며 놀지 고민한 적은 많았지만, 봄에 관해서라면 한강 공원 가서 벚꽃 구경하는 것 외에는 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즐거운 봄 나기를 위해 가장 먼저 계획한 것은 제철 나물을 먹는 것이었다. 봄나물이야 이전부터 부모님이 제철 음식을 먹어야 한다며 식탁에 올려주시는 것을 종종 먹기는 했지만, 성화에 못 이겨 한두 젓가락 깨작거렸을 뿐 내가 먼저 찾아 먹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 입맛이 바뀌었는지 채소로 만든 반찬에 자주 손이 갔다. 게다가 얼마 전 요즘 나의 최애를 맡고 계신 손종원 셰프의 봄나물 예찬까지 듣고 나니, 다른 게 아니라 제철 나물부터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집에서 직접 냉이 튀김을 해 먹는 친구와 함께 성북천 근처에 위치한 식당 ‘공간 뒷동산’을 찾았다. 제철 식재료로 만든 산채 정식을 판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번쯤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8, 90년대 책 표지에 찍혀 있을 법한 브랜드 로고까지 보고 나니 당장 이곳부터 가봐야겠다는 마음이 차올랐다.
직접 찾아간 ‘공간 뒷동산’은 투박한 듯 묘하게 매력적인 로고처럼 독특한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는 공간이었는데,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동산의 능선처럼 둥근 곡선으로 이루어진 목제 천장과 식탁이었다. 천장은 파도처럼 굽이치고, 식탁이 벽과 퍼즐처럼 맞물려 부드럽게 구불거렸다. 하나하나 공들여 맞춤 제작했을 것이 분명한 인테리어였다. 오렌지빛 조명을 받은 유선형의 목제 가구들은 더없이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서 그 속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인테리어부터 이렇게 남다른데 음식에는 또 얼마큼 정성을 다할지 기대가 됐다.
우리는 계절 산채 정식과 계절 나물 비빔면 정식을 시켜 나눠 먹기로 했다. 된장시래기나물, 막장방풍나물, 고추장유채나물, 간장표고버섯나물이 중심을 이루고, 청국장과 봄동 겉절이, 도토리묵 등이 곁들여 나오는 식사였다. 두 정식은 역시나 직접 만든 것 같은 앙증맞은 도자기 그릇에 소담히 담겨 나왔다. 놋수저와 함께 나무 트레이 위에 가지런히 놓인 음식은 맛보기도 전에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서둘러 사진을 몇 장 찍고 젓가락을 들었다.
제철 나물 4종과 들기름을 비빈 메밀면은 담백하면서도 풍부한 맛이 났다. 나물을 하나씩 올려 먹다가 나중에 비빔장과 꼬막 무침까지 한데 넣어 비벼 먹는 밥도 새콤짭짤하니 입맛을 돋웠다. 젊은이들의 입맛에 맞춘 것인지 진하지 않고 은은한 향이 나는 청국장도 맛있었고, 반찬도 어느 것 하나 거슬리거나 튀는 것 하나 없이 입맛에 꼭 맞았다. 원래부터 제철 나물을 잘 챙겨 먹던 사람 마냥 모든 찬을 즐겁게 먹었다. 봄나물이 이렇게 맛있는 줄 왜 진작 알지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다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봄나물의 맛을 일일이 온전히 음미하지는 못했다. 아침 수영을 끝낸 직후에 먹은 첫 끼여서 아주 허기졌던 데다, 맛있어서 흥분한 바람에 정신없이 먹어 치웠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너무 맛있다’는 감상만 기억날 뿐이었다. 아무래도 봄나물의 맛을 하나하나 느끼려면 한번 더 방문해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아늑한 공간에서 건강한 봄 정식을 배부르게 먹고 나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이 정도면 봄 나기를 성공적으로 시작한 것 같았다.
물론 아직 성에 차지는 않는다. 일단 이곳부터 다시 한번 방문해야 할 뿐더러, 제철 과일로 디저트도 해 먹고, 쑥과 도다리도 먹고, 꽃 구경도 가야 한다. 올봄을 낭비하지 말고 끝내주게 만끽해야만 한다. 이 계절을 아까워 하면서, 이 계절을 보내는 나를 아끼면서 남은 4월을 보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