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마지막 일요일

눈 내리는 봄날의 단상

by 윤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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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도서관에 왔다. 지난주에 처음 알게 되었는데, 노트북 작업을 할 수 있는 쾌적한 공간이 있어서 즐겨 찾고 있다. 집 앞 도서관 열람실처럼 빽빽하게 책상이 들어차 있지 않아 좋다. 칸막이 책상들이 가득한 열람실은 생각만 해도 답답한데. 그래도 나름 도서관이니만큼 오가는 말소리는 거의 없고, 클래식 음악과 발걸음 소리나 들려올 뿐이라 집중하기에도 아주 좋다. 근처에 분식집도 있어 평일이라면 작업을 하다가 출출할 때 간단히 요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나는 창문 앞 붙박이 책상에 앉아 있다. 햇빛이 잘 들 뿐 아니라 3층에 위치한 덕분에 창문 너머로 숲과 산, 하늘이 한가득 보인다. 세로로 조금 더 긴 창문의 절반은 하늘이, 반의 반은 나무와 산이, 나머지는 방음벽이 차지하고 있다. 건물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서울에서 만나기 어려운 풍경이다. 도서관 건너편에 바로 솔밭공원이 있어서 봄이 올락말락하다가 급기야 눈까지 내리치는 지금도 녹음을 감상할 수 있다. 그 앞에는 가지치기를 당한 가로수가 있는데, 오늘따라 하늘이 어둡고 뒷산에 안개까지 잔뜩 낀 탓에 앙상한 다섯 손가락 같은 나무 모양새가 조금 섬뜩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여름이 오면 잎이 무성해져 한껏 싱그러울 테다. 벌써부터 여름 풍경이 기대된다. 무성한 신록과 하늘을 전경에 두고, 햇살을 받으며 조용히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공간이라니. 3월 목표 중 하나가 아지트처럼 드나들 근사한 카페를 하나 찾는 거였는데, 카페보다 훨씬 좋은 아지트를 발견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글 쓰는 사이에 날이 개어 손등과 이마를 감싸는 햇빛이 포근하다.


글을 쓰다가 배가 고파져 닭꼬치를 사 먹으러 나갔다. 요즘 밥을 먹어도 금세 허기가 진다. 세 끼 외에도 계속 뭔가를 주워 먹는다. 배고프다. 영화나 소설에서 배고프다는 말은 단순히 음식을 먹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신적 결핍과 갈망, 허기의 은유로 곧잘 쓰인다. 실제로 ‘허기지다’는 말은 배고프다는 뜻 말고도 ‘간절히 바라거나 탐내는 마음이 생기다’ 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생각해보면 요즘 나도 어느 때보다 바라거나 탐내는 것이 많다. 예전에는 그저 바라기만 했다면, 이제는 정말로 내 손에 쥐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다. 올해 들어 생생하고 왕성해진 정신적 허기가 신체적 배고픔으로 이어졌나.


아무튼 도서관에서 나와 4.19민주묘지역 방향으로 조금 걷다 보면 닭꼬치 노점이 있다. 요즘은 최소 4천 원부터 시작하는데, 여기는 3천 원짜리 닭꼬치도 판다. 주문을 하면 얼굴이 빨갛고 잘 웃는 주인아저씨가 초벌된 닭꼬치를 정성껏 구워준다. 얼마나 정성이냐면 닭꼬치 하나를 거의 5분 가까이 구웠다. 수시로 뒤집고, 까맣게 탄 부분은 잘라주면서. 이렇게 오래 걸려서야 바쁠 때 들렀으면 큰일 났겠다 싶었지만, 한가한 나는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얼마나 맛있으려고 이러나 궁금해질 뿐이었다. 그러다 아저씨가 닭 위에 반투명한 흰색 소스를 부었다.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양파라고 했다. 파를 넣지 않는 대신 양파를 간 소스를 올려서 느끼함을 잡아준다고. 자기만의 비법이 있는 곳이라니 기대감이 더 커졌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기다린 뒤에야 받아든 닭꼬치의 맛은, 정말 맛있었다. 불향을 풍기는 고기는 한입 베어 물면 부드럽게 뜯겼고, 매콤달콤한 소스도 과하지 않아 입맛에 잘 맞았다. 아저씨는 컨테이너 밖으로 나와 “이리 와보세요.” 하고 옆으로 가더니 “이렇게 두 번 세 번 잘라서 먹으면 돼요.” 하면서 나무 꼬챙이를 직접 잘라 주는 시범까지 보였다. 친절함에 기분 좋아진 내가 너무 맛있다고 하니 태연히 웃으며 “이것만 파는데 맛있어야지.”라고 답했다. 진심을 다하면서도 느긋한 주인아저씨의 태도에 즐거워졌다. 기분 좋게 배를 채우고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3층으로 곧장 가지 않고 2층 종합 자료실로 향했다. 미로 같은 책장에서 『일간 이슬아 수필집』을 꺼내 들었다. 나는 글을 쓰기 전 다른 작가의 책을 읽어 그들의 힘을 빌려온다. 김승일 시인이 말하길 자기만의 개성을 가지려면 좋아하는 시인 세 명에게 동시에 빙의해서 쓰라고 하던데, 나는 아직 세 명의 작가를 동시에 불러올 만큼 영적 능력이 뛰어나지 않기 때문에 한 명의 작가에게 삼분의 일 정도 빙의해서 쓴다. 오늘 내 삼분의 일은 이슬아 작가였다. (그마저도 접신이 잘된 것 같지는 않지만...) 내가 갓 스무 살이 되었던 그해, 꼭 지금의 내 나이만큼 먹었던 그녀가 썼던 글. 다섯 꼭지 정도 읽자 비실비실 웃음이 났다. 또 이렇게 좋아하는 작가가 생겨버렸다. 나는 솔직한 여자들의 작고 내밀한 이야기에 취약한 모양이다.


2018년 스물일곱 살의 그녀는 안심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나면 자신의 침실에서 함께 자고 가기를 권유하는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관찰해서 세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고. 언젠가 누군가를 위로 같은 키스로 놀라게 해서 슬픔을 까먹게 하고 싶은 사람이며. 좋아하는 사람과 점잖은 대화를 나누기보다 무례하고 엉망이어서 짜릿한 사이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정리하자면, 타인을 나의 반경에 들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사랑과 애정에 관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털어놓는 사람. 스물일곱을 어떻게 살면 좋을지 또 하나의 좋은 레퍼런스가 생긴 기분이다. 무턱대고 남을 따라 하는 것은 지향할 만한 게 못 되지만, 내 앞에 다양한 레퍼런스와 선택지를 가져다 두는 것은 윤택한 삶을 위해 꼭 필요하니까. 이번 봄을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슬아의 글을 읽으면 되겠다. 여러모로 즐거운 3월의 마지막 일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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