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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 말을 며칠씩 곱씹었을까?

말과 마음 사이, 반추가 자라는 자리

by 그냥 하윤

직장인 커뮤니티에서 짧은 고민글 하나를 스쳐 읽었다. 동료가 무심코 던진 말에 기분이 묘했지만, 바로 반응하면 예민하게 보일까 싶어 웃어 넘겼다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그 뒤였다. 며칠이 지나도록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반복되는 반추 때문에 몹시 피곤해졌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이를 '생각이 많아서'라고 설명했지만, 그 문장 아래에는 다른 층위의 고민이 숨어 있는 듯했다.


사람들은 흔히 반추의 습관을 기질의 탓으로 돌린다. 예민해서 그렇다거나, 생각이 많아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나 반추의 뿌리는 대개 성격 그 자체보다, 감정과 표현 사이에 만들어 놓은 간격의 방식에 더 가깝다. 반추가 잦은 사람일수록 대화의 순간에 감정을 곧바로 드러내기보다는, 한 번 포장하거나 각도를 바꿔 말하는 데 익숙하다. 이 방식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감정의 표면을 덮어 말하는 데 익숙해질수록, 타인의 말에서도 자연스레 '표면 아래'를 먼저 탐색하게 된다.


"그 표현 안에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라는 추가 해석이 붙고, 직접 표현되지 않은 자신의 감정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마음속에 오래 남는다. 반추는 바로 그 여백에서 자라난다. 표면의 말과 속의 마음 사이에 생긴 틈, 그리고 그 틈을 메우느라 소모되는 에너지.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생각을 완전히 숨기지 않은 채, 전달 가능한 정도로만 정제해 즉시 대화를 이어간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를 말하되,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을 정도로만 표현을 다듬는 것이다.


나 역시 '솔직하되 선은 지키는 소통'이 내면의 평화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경험적으로 깨달았다. 물론 나의 감정이 날 선 무례함으로 비치지 않도록 표현을 세공하는 과정은 거친다. 예컨대 "퀄리티가 낮다"는 말을 그대로 던지는 대신 "조금 더 다듬으면 좋을 부분이 있다"라고 각도를 조정하는 식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내가 나를 드러내는 방식이 곧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까지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내 언어에 불필요한 불순물을 섞지 않기에, 타인의 언어 또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방식은 사회생활 중 누군가 칭찬인지 비꼼인지 애매한 말을 던졌을 때도 또 다른 형태로 작동했다. 상대방의 숨은 의도를 따로 추적하지 않고, 입 밖으로 나온 의미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렇게 답한다. "정말요? 그렇게 말해주시니 자신감이 생기네요. 고마워요."


그 사람이 속으로 B를 뜻했을지 몰라도, 공식적으로 발화된 것은 A이므로 나는 A로만 받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반응하면 이상하게도 그 다음부터는 상대방의 말이 비틀리거나 모호하게 나오는 경우가 줄어든다. 숨은 뜻을 해석하려 애쓰기보다 표면을 받아들이는 단순함이 관계의 잡음을 줄여줄 때가 있다.


결국 피로의 지점은 다르지만, 그 뿌리는 같다. 표현을 미루는 사람은 말하기 전과 후에 오랫동안 감정을 붙잡아둔다. 반면, 표현을 바로 꺼내는 사람은 '말하는 순간'에만 잠깐 머무르고 뒤로 넘긴다. 피로의 방향은 다를지언정, 이 두 방식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관계의 긴장을 관리하려는 움직임이다. 반추는 생각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표현되지 못한 감정이 자신의 내부에서 머무르는 '시간의 문제'에 가깝다.


마음이 머무는 속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누구는 말하기 전에 오래 멈추고, 누구는 말한 뒤에 거의 머물지 않는다. 이 단순한 차이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관계에서 불필요한 오해와 자기소모를 줄일 수 있다. 커뮤니티의 고민글이 며칠이나 내게 남았던 이유도 결국 그 때문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생각을 곱씹지?"라는 질문 아래에는 사실 "나는 어떻게 말해야 덜 지칠까?"라는, 더 본질적인 고민이 숨어 있었다.


표현의 방식은 결국 마음을 지키기 위한 작은 기술이다.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가 택하는, 각자의 속도와 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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