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가 70%인 인간의 넋두리, 위로는 꼭 다정해야 할까?
나는 흔히 말하는 T 유형이다. 말보다 계산이 빠르고 감정보다 원인을 먼저 찾는 쪽. 태생부터 그랬다. 가끔 'T발놈'이라고 놀림을 받을 정도로, 사근사근하고 다정하게 위로하는 쪽과는 거리가 멀다.
누가 힘들다고 하면 "왜 힘든데?"부터 묻는다. 누군가 내게 "괜찮아, 힘내" 같은 말을 건넸을 때 마음이 나아지는 편도 아니었다. 감동받기보단 속으로 '이 말로 내가 뭐가 괜찮아지지?' 하고 반사적으로 필터링해 버렸다. 그래서인지 예전엔 친구에게 공감 능력이 고장 났다는 말도 종종 들었다. 공감하고 리액션하는 방식이 다를 뿐인데.
억지로 위로를 흉내 내려던 시도도 있었다. "아, 그렇구나. 너무 힘들었겠다" 같은 말을 따라 해 봤지만, 어색함만 남았다. 말은 가볍게 튀어나왔지만 속에선 벨이 울렸다. 이건 내 언어가 아닌데 왜 자꾸 내 입에서 흘러나오지? 나는 배우가 아닌데. 그 어색함은 상대도 느꼈을 것이다. 공감의 모양만 흉내 낸 리액션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행동을 택했다. 친구가 평소 필요하다고 했던 걸 챙겨주거나, 좋아하는 디저트를 사 와서 먹고 힘내라고 툭 내미는 식. 말을 예쁘게 못 하기 때문에 차라리 돈을 쓰는 것도 있다. 무뚝뚝한 배려는 그렇게 물질의 형태로 표현되곤 했다.
이런 방식은 직장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잔소리를 늘어놓는 상사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사근사근 다독이는 상사도 아니었다. 누군가를 토닥이는 것보다, 커피 한 잔이나 점심 한 끼를 사주며 "먹고 기운 차려요"라고 하는 게 차라리 편했다. 그게 현실의 직장인에겐 가장 실질적인 위로 같기도 했으니까.
어느 날은 부하직원이 실수로 크게 낙담해서 찾아왔다. 문 앞에서부터 이미 풀이 죽어 있었다.
"아무래도 제가 잘못한 거겠죠?"
그 말에 모니터를 켜고 상황부터 파악해 보았다. 아무래도 기획자와 업무를 조율하는 과정에 미스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룹웨어로 관련 내용을 살펴본 뒤, 그녀가 눈앞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걸 의식하며 대답했다.
"음… 네, 잘못 맞네요. 일단 제가 그쪽 팀장님과 직접 소통할 테니까 기다려보세요."
그 사원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괜찮다는 말을 기대했는데 팩트만 툭 던진 것 같았다. 아마도 다른 사람이라면 등을 토닥이며 "힘들었지? 괜찮아. 네 잘못 아니야"라고 했을지 모르겠다.
몇 시간 뒤 예상대로 일이 해결되었다. 다행히 생각만큼 복잡한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잠깐 그녀를 불러내어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사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일은 어쨌든 해결은 됐어요. 이제 그 일로 더는 스트레스 받을 필요 없어요."
그런데도 그녀에겐 여전히 초조해하는 기색이 남아 있었다. 나는 커피 잔을 돌리며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는 나에게도 그런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그냥 별일 아니었더라. 세상 무너지는 것 같겠지만 그 실수, 누구나 겪는 시행착오고 그렇게까지 걱정할 정도로 큰 일은 아니라고.
"작은 일에 너무 매몰돼 있지 말고 툭툭 털어버려요. 인생 길잖아요. 이 정도는 연습 문제예요.”
다소 염세적인 말투로 덧붙였다. 이 정도 일로 낙담하면, 나중에 더 큰 물에서 놀 수 없다.
그러자 그녀가 "어떻게 하면 과장님처럼 멘탈이 안 무너질까요?"라고 물었고, 나는 몇 년 조금 더 살아보니 노화가 와서 그렇게 되더라고, 자조적인 웃음을 섞어서 얘기했다. 실제로 나이 들면 감정의 진폭이 줄어들고 스트레스에도 내성이 생긴다. 호르몬이 그렇게 만든다.
"망하란 법은 없어요. 사람 일이란 게, 수렁으로 가는 것 같아도 결국 중간엔 건져져요."
이건 내 입버릇 같은 말이었다. 세상의 먼지 같은 일에 굳이 감정을 쏟을 필요는 없다는 게 내 철학이었다. 안 그래도 별것도 아닌 게 사람 건드리는 일이 너무나 많은 세상이니까. 나는 그저 그 철학을, 특별한 의식 없이 평소처럼 내뱉었을 뿐이다.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먼저 주먹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잠시 웃더니 곧 주먹을 맞댔다. 잘하자는 짧은 한마디와 함께 툭 부딪친 손끝이, 긴 대화보다 훨씬 확실한 마무리가 되었다.
그날 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그 사원에게서 장문의 카톡이 도착했다.
"과장님, 오늘 너무 감사했습니다. 저는 과장님이 오히려 제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 별것 아니고 인생의 아주 사소한 점일 뿐이라고 얘기해 주셔서 위로가 됐어요. 마음속의 큰 짐덩어리가 덜어진 것 같아서 좋았어요. 그 얘기들을 때 와, 과장님은 정말 어른이구나 느꼈어요. 제가 상사 복이 있나 봅니다. 좋은 밤 보내세요!"
엥, 내가 어른이라고? 그 말에 약간 갸웃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나도 그런 위로가 편했다. "힘들었겠다"보다는 "그깟 일로 왜 그래" 같은 말이 나를 제정신으로 돌려놨다. 감정에 동조하는 대신, 객관적인 거리감을 제공해 주는 사람이 고마웠다.
어떤 사람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누군가 높은 곳에서 지도를 펼쳐 보여주기를 원한다. "이건 누구나 겪는 일이고 당신만 특별히 못난 게 아니야"라는 말에서 해방감을 느낀다. 마치 병원에서 의사가 "다행히 큰 병은 아니네요"라고 말해줄 때 느껴지는 안도감처럼.
물론 모든 사람이 이런 방식을 원하는 건 아닐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공감과 따뜻한 말이 절실할 때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감정의 늪에서 건져 올려주는 이성적인 손길이 더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세상에는 다양한 위로의 언어가 존재한다. 감정에 공감해 주는 위로도 있고, 객관적인 시각을 제공해 주는 위로도 있다. 중요한 건 진정성이다. 내가 억지로 흉내 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건넬 수 있는 방식이 결국 가장 좋은 위로일 것이다.
T 유형의 위로법.
그것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듯 상황을 바라보게 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 한마디 덧붙이는 것이다.
"망하란 법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