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속이는 메타인지적 자기기만
모름지기 인간이란 존재는 원래 자신을 속이는 데 꽤 능숙하다. 오래전부터 그랬다. 어쩌면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마음의 평형을 맞추는 건 아주 오래된 생존 기술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 기술이 조금 더 복잡해진 것 같다. 예전에는 단순히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아냐, 그럴 리 없어" 한마디로 마음을 달랬다면, 이제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나는 내가 나를 속이고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걸 인식하고 있으니까 오히려 성찰적인 거 아닐까?"
메타인지는 원래 자기 생각을 한 걸음 물러서 바라보는 능력이라고 한다. 부족한 부분을 알아차리고 고쳐나가는 힘. 쉽게 말해,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한 번 더 바라보는 일. 그런데 요즘은 여기에 자연스럽게 덧붙는 게 있다. 바로 '자기 서사 만들기'다. 불편한 사실을 조금 덜 불편하게 만들기 위해 이야기를 덧붙이고, 그 이야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그것이 내 진실처럼 굳어진다.
예전에는 단순히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해버리면 끝났던 일들이 요즘은 조금 더 세련된 설명으로 포장된다.
내가 이런 선택을 한 건 내 책임도 있지만, 어릴 때 형성된 성격이나 환경적인 요인도 있었고, 요즘 사회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말이다. 스스로 생각이 깊다고 느끼는 순간 어느새 그럴듯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 과정에서 불편한 부분은 희미해지고, 괜찮아 보이는 부분은 과장되기 쉽다.
나의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요즘 운동을 못 하는 건 업무 스트레스 때문이야. 몸도 마음도 지쳐있어서 회복이 필요해." 라고 말하며 침대에서 밍기적 거리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업무로 인한 피로는 분명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동안 유튜브 쇼츠를 2시간째 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굳이 떠올리지 않았다.
비슷한 양상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도 흔히 드러난다.
오래전 알던 어떤 사람은 "나는 연애에 집착하지 않는 편이라서 오히려 상대가 나에게 매달려." 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루 종일 상대방의 답장을 기다리며 불안해했다. 마음이 불안하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스스로를 쿨한 사람으로 포장해낸 셈이다.
또 어떤 사람은 큰 목표를 세우는 순간 이미 절반은 이룬 것처럼 착각했다. "곧 창업을 할 거야", "유튜브 채널을 제대로 운영할 거야"라며 잔뜩 들떠 있지만, 정작 사업계획은 미완성이고 채널엔 업로드 하나 없는 상태다. 실제 행동은 거의 없는데도 스스로를 '준비 중인 사람', '곧 뭔가를 이룰 사람'으로 정의하며 그 사실만으로도 만족했다. 목표를 세웠다는 사실이 곧 안도감이자 자기 위로였던 것이다.
이런 과정은 누구나 경험해본 적 있을 것이다. 불편한 부분을 감추고, 감정을 다시 정의하고, 책임을 미루고, 그 모든 걸 고민하는 자신을 위로하는 일. 복합적이고 교묘해서 때로는 내가 나를 속이는지도 잘 모른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던닝-크루거 효과'. 능력이 부족할수록 자기 한계를 잘 모른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무지에 가깝다. 내가 흥미롭게 보는 건 오히려 생각이 많을수록, 그 정교한 생각이 더 정교한 자기기만으로 이어지는 경우다.
또 하나는 '인지부조화'다. 마음속 모순을 견디지 못해 새 이야기를 짜 맞추는 성향. 불편한 부분은 합리화로 덮이고, 그럴듯한 설명이 붙으면서 자기기만은 강화된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더 교묘해진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인스타그램, 유튜브, 링크드인에서 만든 '나'의 모습은 실제의 나를 점점 대체해 간다. 페르소나가 커질수록 본래의 나는 조용한 조연이 된다. 그렇다고 자기기만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지나치게 현실만 직시하면 삶이 너무 버거워질 때가 있다. 적당한 자기기만은 일종의 완충장치다.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오히려 무력감이 앞서지 않던가.
그러나 성찰이라는 건 이런 자기기만을 조금씩 알아차리면서 서서히 벗겨내는 과정일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메타인지라는 그럴듯한 말 뒤에 다시 그 자기기만을 숨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자주, 꽤 정교하게 스스로를 속이며 산다. 그걸 눈치챘다는 사실만으로도 잠시 안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짜 성찰은 내가 또 나를 속일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인정하는 데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렇게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또 다른 자기기만일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라도 적어두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 아닐까.)
우리는 아마 끝내 자기기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걸 조금이라도 알아차리는 순간, 완전히 속는 것만은 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게 인간적인 방식의 성찰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