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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장르는 느와르

한여름, 감정은 끓고 언어는 날 선다

by 그냥 하윤

여름의 시작, 도시는 점점 흐릿해진다.

아지랑이로 번지는 아스팔트의 윤곽, 셔츠에 들러붙은 등판의 땀, 언제부턴가 울리기 시작한 매미 소리. 이 풍경은 오래된 느와르 영화의 한 장면을 닮았다.


무겁고 끈적하며 어딘지 날이 서 있다. 햇빛은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라 고문에 가까운 조명이고, 그 아래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여름의 공기는 정직하다. 모든 것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감정은 끓고 언어는 예민해지며, 눅눅한 공기 속에서 인간의 본능이 불쑥 튀어나온다. 여름은 감정을 곧바로 표면으로 끌어올린다.


누가 먼저 참을성을 놓치나 보는 듯한 오후.


사람들은 흔히 여름을 푸른 하늘과 청량한 공기의 계절로 떠올린다. 하지만 그런 장면은 대개 냉방이 잘 된 실내, 이중창 너머에서나 존재한다. 현실의 여름은 눅진하고 무겁다. 감정마저 땀에 절어 있다.


그래서 나는 여름을 로맨스가 아닌 느와르의 계절이라 부르고 싶다. 이 계절엔 사랑도 낭만도, 희망도, 쉽게 탈수되고 자주 무너진다.


느와르 영화의 무대는 대체로 밤이다. 어둠, 연기, 비 내리는 골목, 한쪽 조명만 들어온 방. 그런데 요즘 여름은 한낮이 더 느와르스럽다. 빛은 지나치게 강하고 그림자는 그만큼 날카롭다. 얼굴의 피로, 말투의 떨림, 숨기던 감정의 얼룩까지 모두 드러난다.


후텁지근한 도시 골목을 걷는 사람들은 서로를 외면하려 애쓰지만, 동시에 언제든 부딪칠 준비가 되어 있다. 말 한마디가, 땀 한 줄기가 싸움의 도화선이 된다. 여름의 풍경은 단순히 더운 게 아니라 정지된 폭발 직전의 상태다.


도시는 스스로를 식히기 위해 매일 어디선가 김을 뿜는다.


더위는 사람을 바깥에서부터 서서히 무너뜨린다. 몸이 지치면 뇌가 피로해지고, 뇌가 피로해지면 도덕적 판단이 가출한다. 끈적한 공기와 식지 않는 밤이 겹치면 인간의 이성은 어느 순간 본능으로 전환된다. 계절이 사람을 바꾸는 게 아니다. 더위가 인간성을 증발시킨다.


여름엔 감정이 눅눅해지고 경계는 흐려진다. 옳고 그름 사이엔 습기가 차고, 말 한마디에 불쑥 금이 간다. 누구나 평소보다 조금 더 예민해진다. 사소한 다툼이 쉽게 번지고, 예고 없이 터지는 사건도 많아진다. 마치 도심 곳곳에 보이지 않는 도화선이라도 깔린 듯이.


느와르 장르의 정서 중 하나는 ‘무력감’이다.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어디선가 조금씩 나빠진다. 여름이 딱 그렇다. 희망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어디 있는지 더위에 눌려 잘 보이지 않는다.


빛은 쏟아지고, 온도는 이미 폭력이다.


우리는 여름을 멀리서 바라볼 때만 사랑스럽다고 느낀다. 영화처럼, 엽서처럼, 카페의 통유리 너머처럼.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점점 흐릿하고 끈적해진다. 느와르는 언제나 그 간극에서 시작된다. 현실과 환상이 충돌하는 열기 속에서.


그래서 나는 말한다. 여름은 날씨가 아니라 장르다. 그것도 로맨스도 힐링도 아닌, 느와르다.


에어컨 바람에 싸우고, 창문을 누가 닫았는지로 신경전을 벌이며, 아이스크림 하나에 기분이 뒤틀리는 계절. 우리는 그 속에서 본능적으로 살아간다. 모든 감정은 덥고 모든 관계는 땀이 난다.


여름을 살아낸 우리는 각자의 느와르 속 주인공이고, 계절이 지나도 그 흔적은 쉽게 벗겨지지 않는다. 다만 그걸 굳이 말하지 않을 뿐이다. 땀이 말라붙은 셔츠처럼, 그냥 입고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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