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3호선, 압축된 채 건너는 시간

그 시간, 나는 사람보다 화물에 가까워진다

by 그냥 하윤

서초동에서 계약서를 쓴 날, 거래처 근처에서 혼자 식사를 했다. 허기가 져서라기보다는, 무언가를 마무리했다는 의식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식당을 나와 지하철역으로 내려갔을 때,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발걸음이 느려졌고, 개찰구 앞에서 잠시 흐름이 막혔다. 무심코 휴대폰 화면을 켰다. 저녁 여섯 시였다. 그제야 상황이 맞물렸다.


"아차, 지금 퇴근 시간대였지."

지금 이 시간대에 3호선 만원 지하철을 타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채 배를 채운 건, 내 몸이 필요 이상으로 성실했던 탓이다. '차라리 밥을 먹지 말걸' 하는 생각이 뒤늦게 따라왔다.


교대역의 플랫폼을 가득 메운 인파 앞에서, 생각보다 먼저 몸이 반응했다. 어깨가 굳고 숨이 짧아졌다. 프리랜서가 된 이후 잊고 살던 감각이었다. 오랜만인데도 낯설지 않았다. 나는 이미 이 시간대를 오래 통과해 본 사람처럼, 가장 덜 흔들릴 자리를 계산하고 있었다.


열차가 도착하자 망설일 틈도 없이 몸이 밀려 들어갔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가는 순간, 개인의 윤곽은 빠르게 흐려졌다. 팔은 들어올려지지 않았고, 발이 바닥에 닿아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시선은 타인의 옷깃이나 허공 어딘가에 고정되었다. 불편해서라기보다는, 내가 '나'라는 형태로 남아 있기 어렵다는 사실이 묘하게 낯설었다.


각자의 하루가 접힌 채 실려 간다.


퇴근 시간대의 지하철은 사람을 태운다기보다 무언가를 수송한다는 느낌에 가깝다. 그 안에서 나는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기보다, 처리되어야 할 단위가 된다. 누가 나를 밀치지 않아도, 거친 말이 오가지 않아도, 그 공간에 서 있는 것만으로 에너지는 서서히 닳아간다. 이것은 이동이라기보다 흐름에 가깝다. 마치 사람이 아닌 화물이 된 듯한 느낌이다.


출근길과 퇴근길은 비슷해 보이지만, 공기의 결은 다르다. 출근길에는 아직 얼굴이 남아 있다. 피로든 긴장이든, 각자가 수행해야 할 역할이 표정 위에 얇게 걸쳐 있다. 퇴근길에는 그마저 벗겨진다. 하루치 에너지를 소진한 사람들은 더 쉽게 사물이 된다. 밀도는 높아지는데, 연결감은 희미해진다.


열차가 한강 위를 지날 때 그 아이러니는 분명해진다. 강남에서 강북으로, 일의 영역에서 개인의 영역으로. 생산되는 시간에서 회수되지 않는 시간으로 넘어가는 짧은 구간. 차창 밖의 풍경은 열려 있는데, 내 몸은 가장 압축된 상태로 존재한다. 서울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건너면서, 나는 가장 부자유해진다.


누가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아도, 이 구조는 충분히 사람을 소모시킨다. 그래서 그 칸 안에는 외로움도 분노도 남지 않는다. 대신 묘한 무감각이 남는다. 타인의 체온이 닿아도 반응하지 않게 되는 감각.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작동하는, 조용한 차단이다.


가장 넓은 풍경을 지나는 동안, 나는 가장 움직일 수 없었다.


일하는 동안에는 역할이 나를 대신 설명해준다. 퇴근길에는 그 역할이 벗겨지지만, 아직 집에 도착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지하철은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잠시 보관되는 장소처럼 느껴진다. 직장인도, 생활인도 아닌 채로 어딘가에 걸려 있는 시간.


그 압축된 감각이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처음 겪는 불편이 아니라, 이미 한 시기를 통과하며 몸에 남은 기억 같았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서 있는 동안, 지금의 내가 아니라 예전의 내가 먼저 반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기억은 자연스럽게 퇴사하기 직전의 시간으로 이어졌다. 그때의 나는 오히려 늦은 귀갓길에 익숙해져 있었다. 꺼져 있는 한강의 불빛과, 텅 빈 객차. 몸은 편했지만 그 편안함이 정상 같지는 않았다. 붐비는 퇴근길보다 조용한 귀갓길이 익숙해졌다는 사실이, 상태가 얼마나 기울어 있었는지를 말해줬다.


오랜만에 탄 퇴근길 3호선에서, 나는 예전의 나를 다시 만났다.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지만, 어딘가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기분으로.


몸이 압축되는 시간에 생각은 풀려나간다. 머무를 수 없는 곳에서, 생각만은 오래 머문다. 그게 퇴근길 지하철이 내게 남긴, 지독하고도 이상한 습관이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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