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투스'라는 말보다 먼저 배운 것들
요즘 서점가나 SNS 상에서 '아비투스'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누군가는 이를 성공의 치트키라 부르고, 누군가는 태생적으로 정해진 보이지 않는 계급장이라며 분통을 터뜨린다. 하지만 내게 이 단어는 차가운 학술 용어라기보다, 어린 시절 엄마가 무심한 얼굴로 흩뿌려 놓았던 경험의 조각들에 더 가깝다. 그때는 의미를 몰랐고, 나중에서야 이름을 알게 된 것들이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을 처음 집에 초대한 날을 기억한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친구들은 거실을 한 바퀴 훑어보더니 당혹감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네 집 생각보다 안 크네?"
그 말은 비아냥이 아니라, 짐작이 빗나갔을 때 새어 나온 솔직한 반응에 가까웠다. 나는 그제야 친구들이 떠올렸던 그림과 눈앞의 풍경 사이에 작은 간극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어긋남 앞에서 묘하게 민망해졌고, 그날 처음으로 집의 크기보다 먼저 사람에게 덧씌워지는 이미지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집은 가난하지도, 그렇다고 대단히 풍족하지도 않은 평범한 가정이었다. 엄마는 정작 본인에게는 참 무던했다. 몇 년째 유행 지난 코트를 손질해 입으면서도, 우리 자매에게는 늘 백화점에서 고른 단정한 옷을 입혔다. 그 선택에는 과시라기보다, 자식들이 어디서든 주눅 들지 않길 바라는 자신만의 기준이 깔려 있었다.
어릴 적의 나는 그 기준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한 달에 한 번쯤은 어린이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러 가고, 낯설지만 단정한 공간의 활기 속에 머무는 일이 내게는 공기처럼 당연했다. 그게 우리 집만의 방식인지도 모른 채. 그 착각이 풀린 건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내가 당연하다고 믿었던 그 환경이, 사실은 엄마가 자신의 몫을 조용히 덜어내며 만들어낸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다.
엄마는 오래 외식업을 하며, 취향과 기준이 자연스럽게 걸러지는 자리를 가까이서 봐왔다. 그곳에서는 손님의 말투나 주문 방식, 사람을 대하는 태도 같은 사소한 장면들만으로도 그가 어떤 세계를 통과해왔는지가 드러났다고 했다. 돈이 많다고 해서 대화의 중심에 서는 건 아니고, 어떤 세계를 경험해 왔는지는 말보다 태도에서 먼저 새어 나온다는 것.
그래서일까, 성탄절이면 엄마는 늘 조금은 격식을 차린 식당을 골랐다. 패밀리 레스토랑 대신 예약이 필요한 곳을 택했고, 기념일이면 호텔 뷔페에 데려가기도 했다. 그렇다고 포크 쥐는 법을 가르치거나 예절을 훈계하진 않았다. 그저 그 공기 속에 우리를 자주 데려다 놓으며 그저 익숙해지게 했을 뿐이다.
"이런 곳도 몇 번씩 와 봐야 나중에 남들 앞에서 기죽지 않아."
그 말의 정확한 뜻을 그때는 몰랐다. 다만 그 식사 자리들이 늘 즐겁기보다는, 조금 긴장됐다는 사실만은 또렷이 기억난다.
엄마의 선택이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장면은 초등학생 때의 어느 여름방학이다. 방학이 되자 엄마는 언니와 나를 해외에 사는 이모 집으로 보냈다. 김포공항 출국 게이트 앞에서 아빠는 몇 번이나 발걸음을 멈췄고, 엄마는 그 옆에서 끝까지 담담했다. 언어도 생활도 다른 곳으로 보내면서도, 엄마는 비행기 표를 건네며 짧게 말했다.
"공항 도착하면 이모 있을 거야. 엄마가 다 연락해 놨으니까 비행기만 잘 찾아서 타고 가. 여기 알파벳 보고, 저기 언니들 따라서 가면 돼."
영어 한마디 제대로 못 하던 어린 아이 둘을 국제선 비행기에 실어 보낸 그 무심한 투척은,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실전 훈련에 가까웠다. 낯선 공간 앞에서 얼어붙지 않고, 일단 한 발을 내디뎌보는 법을 몸으로 익히는 시간이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엄마의 선택들이 어떤 마음에서 나왔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사회에 나와 낯선 자리에 서거나 문턱 높은 장소의 공기를 마주할 때, 나는 이상하게도 크게 위축되지 않았다. 대단한 자신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아, 이거 아는 세계다'라는 몸의 기억에 가까웠다.
낯선 사람들의 세련된 말투나 공간의 문법이 완전히 처음은 아니라는 감각. 그건 내가 그 세계의 주인공이라는 확신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 공기 때문에 내가 투명해지지는 않을 거라는 안도감을 주었다.
엄마는 나에게 건물을 물려주지는 않았지만, 어디서든 위축되지 않게 해주는 얇은 갑옷을 입혀주었다. 필요 없을 때는 잊고 지내다가도, 없으면 문득 불안해지는 그런 보호막. 몸에 남아 오래 작동하는 이 결을 누군가는 아비투스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 그것은 훨씬 실용적인 유산이다. 평범한 집에서 자랐지만, 어떤 자리에서도 초라해지지 않는 어른이 되는 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돌이켜보면 엄마는 나에게 더 많은 것을 설명해주지 않았다. 대신 몇 번의 장면 속에 나를 자주 데려다 놓았을 뿐이다. 낯선 식탁, 익숙하지 않은 공기, 갑자기 혼자 서야 했던 공항의 출국 게이트. 그 장면들은 당시에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내 안에서 조용히 의미를 바꿔갔다. 설명은 잊혀도, 익숙해진 감각은 오래 남는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됐다.
요즘 사람들이 아비투스를 말할 때마다, 나는 그 단어보다 먼저 엄마의 무던한 코트와 공항의 서늘한 공기를 떠올린다. 누군가에겐 넘기 힘든 벽이었을지도 모를 그것을, 엄마는 굳이 이름 붙이지 않은 채 넌지시 건네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여전히 평범한 삶을 살고 있지만, 적어도 어떤 세계 앞에서 스스로를 잃지는 않는다. 어쩌면 엄마가 진짜로 물려주고 싶었던 건 계층을 넘는 법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