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마다 색을 바꾸는 카멜레온에 대하여
겨울의 공기는 차갑지만, 실내의 온기는 유독 다정하다. 친구들과 새해를 시작하며 나눈 대화 속에서 누군가 무심코 이런 말을 던졌다. "나는 회피형 남자는 다신 안 만날 거야." 그 말에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누군가는 농담을 덧붙였다. 안정형, 불안형, 회피형. 언제부턴가 타인을 설명하는 가장 간편한 언어가 되어버린 단어들이 신년회의 테이블 위를 분주하게 오갔다.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의 상태는 제각각이었다. 오랜 솔로도, 막 관계를 정리한 이도, 그리고 곁에 소중한 온기를 둔 이도 있었다. 같은 단어를 말하면서도 각자가 품은 해석은 달랐다. 애착 유형이라는 말은 단순한 심리 지표를 넘어, 우리가 관계를 대하는 태도와 삶의 궤적 전체를 비추는 거울처럼 작동하고 있었다.
대화가 끝난 뒤에도 질문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관계 안의 나와 그 바깥의 나는 정말 같은 색일까. 그런 의문 끝에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았던 ECR, 애착유형 테스트를 다시 마주했다.
의외로 결과는 '안정형'이었다. 하지만 문항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기묘한 모순을 느꼈다. 만약 내가 지금 이 순간, 신뢰하는 이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 질문들에 답했다면, 결과는 판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질문들에 언제, 어떤 상태의 자신으로 답하고 있는 걸까. 관계 안에서의 나와 혼자일 때의 내가 다르다면, 그중 어느 쪽이 '진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예전의 나는 '힘든 일이 있을 때 타인에게 의지하는가?' 라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아니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 이유는 타인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 감정을 굳이 남의 하루에 얹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혼자 감당하는 편이 더 편했다. 누군가를 붙잡고 하소연하는 대신, 잠시 숨을 고르고 정리한 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방식이 내게는 자연스러웠다.
그럼에도 결과 해석은 단정적이었다.
'거부-회피형 애착 유형, 타인에 대한 신뢰가 낮음, 정서적 친밀감 회피.'
질문 하나가 동기와 맥락을 지운 채 태도로만 사람을 분류하는 순간이었다. 혼자 감당하려는 선택은 언제부터 곧바로 결핍의 증거가 되었을까. 어쩌면 우리는 모두 관계의 피로 속에서 잠시 숨 쉴 틈이 필요한 것뿐인데 말이다.
누군가와 깊이 연결되어 있을 때의 나는 솔직하고 투명한 안정형의 모습을 띤다. 반면 관계의 바깥에서는 전형적인 거부-회피형의 수치를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나의 회피성은 타인을 향한 공포나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내 부정적인 감정을 굳이 타인에게 떠넘기지 않겠다는 태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혼자 감당하겠다는 선택에 가깝다.
상황에 따라 거리를 조절하는 나는 관계의 이중인격자일까, 아니면 노련한 카멜레온일까. 그것도 아니면, 애착이란 원래 누군가와의 사이에서만 색을 띠는 물감 같은 것일까.
이런 방어 기제는 20대의 시간을 거치며 서서히 굳어졌다. 당시의 나는 내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상대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까 늘 먼저 계산했다. 독립적인 성향 위에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감각이 더해지면서, 말하지 않는 쪽이 더 성숙한 태도라고 믿어왔다.
그런 나를 밖으로 이끈 것은 역설적으로 상대의 조용한 수용이었다. 아주 작은 속마음을 꺼내 놓았을 때 "그렇게 털어놔줘서 정말 고마워"라고 답해주던 안정형의 문장들. 나의 취약함이 누군가에게 짐이 아닌 신뢰의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경험은, 오래 닫혀 있던 문의 높이를 조금씩 낮추는 계기가 되었다. 친밀함이란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 아니라, 불완전한 마음의 기꺼운 공유라는 것을, 그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관계의 방식을 조금 바꿨다고 해서, 모든 이에게 무작정 마음을 연 것은 아니었다. 몇 해 전의 나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사람 앞에서 오히려 닫힌 문을 두드리는 쪽에 가까웠다. 대화를 시도할수록 설명과 이해의 책임은 내 몫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나는 점점 말을 고르고 감정을 줄이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 시간을 지나며 분명해진 것이 있다. 어떤 침묵은 배려가 아니라, 상대에게 감정의 뒤처리를 떠넘기는 비겁함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닿지 않는 관계 앞에서, 나는 더 이상 애쓰지 않기로 했다. 소통할 용기가 없는 사람에게 귀한 마음을 낭비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현재의 내가 누군가에게는 투명한 안정형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적당한 거리를 두는 회피형으로 보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나의 회피성은 결핍이 아니라 '선택적 자립'이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나를 존중해 주는 안전한 존재가 곁에 있을 때, 나는 관계 안에서 힘을 빼도 된다는 확신을 얻는다. 그 외의 영역에서 유지하는 거리감은 내 에너지를 지키기 위한 보안 시스템에 가깝다.
애착 유형은 타고난 형벌이 아니라, 내가 누구를 곁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관계의 온도계일지 모른다. 20대의 조심스러운 침묵과 30대의 자립을 거치며, 나는 이제야 내 마음의 도어락 번호를 누구에게 공유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완벽한 선택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어떤 관계에서는 거리를 두고, 또 어떤 관계에서는 속도를 조절하는 데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차가운 섬이고, 내 사람에게만큼은 깊은 대륙이어도 괜찮다. 상황에 따라 색을 달리하는 이 태도는 비겁함이 아니라, 나름의 생존 기술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조금 늦게 배웠다. 아직은 서툴지만, 계속 다듬어 가는 중인 나만의 관계 맺기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