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부터 그의 요약본이 되었을까

MBTI와 사주가 만든 관계의 프레임

by 그냥 하윤

"너 T지?"

최근 5년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말하면 조금 편했다. 나라는 복잡한 인간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T' 한 글자로 정리가 됐으니까. 공감 대신 해결책을 내놓고, 감정이 일렁일 땐 멈춤 버튼부터 누르는 내 반응들. 이것들이 MBTI라는 체계 속에서 하나의 유형으로 묶이자 묘하게 안심이 됐다. 나를 요약하게 놔두는 것은, 나를 설명해야 하는 고단함에서 잠시 벗어나는 도피처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요약의 달콤함은 관계가 깊어질수록 예상치 못한 청구서를 내밀었다. 몇 해 전 사귀었던 누군가와 재미로 보러 갔던 사주 카페가 그 발단이었다. 역술가는 내 사주를 보더니 혀를 쯧, 차며 말했다.


"사주에 금이랑 수가 강해. 냉정하고 속을 알 수 없단 얘기 많이 듣죠? 남자친구가 애 좀 먹겠어."


옆에서 그 말을 듣던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그가 찾고 있던 건 나라는 사람의 실체가 아니라, 나를 가둘 수 있는 완벽한 명분이었다는 것을.


그날 이후, 상대는 나라는 사람의 실체를 관찰하는 대신 역술가가 건네준 요약본을 경전처럼 받들었다. 내가 업무에 치여 녹초가 된 날 말수가 적어지는 건 지극히 개인적이고 맥락적인 피로의 신호였으나, 그에게 나의 침묵은 사주에 기록된 냉정함으로 번역되었다.


"거봐, 그 사람 말이 맞네. 넌 정말 속 얘기를 안 해."

내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내 눈앞의 표정을 읽는 대신, 자기 머릿속에 저장된 내 사주 단자와 싸우고 있었다.


종이 위의 문장들이 나보다 먼저 나를 설명하던 순간.


그 역술가의 해석은 점점 일상으로 스며들었다. 사주의 관(官)이 도화로 작용해 이성이 꼬인다는 말은, 상대에게 나를 걱정한다는 명목으로 행동을 통제할 명분을 쥐여주었다.


"그 인간이랑 아직도 회사에 있어?"

"너한테 사심 있는 거 아냐? 왜 밤 늦게까지 붙어있는 건데?"


개발자 동료와 야근을 하며 코드를 맞추는 나의 성실함은 '남자와 붙어 있는 불온한 기운'으로 치환되었다. 내가 무엇을 만들고 있었는지, 어떤 일정에 쫓기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의 커리어와 일상은 삭제되고, 오로지 남자 문제라는 프레임만 남았다. 그는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 했다기보다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크기로 줄여두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 과정에서 나 역시 완전히 무고하지는 않다. 나를 설명하는 일은 늘 번거롭다. 침묵이 성격이 아니라 컨디션의 문제라는 것, 야근이 팔자가 아니라 직업의 특성이라는 걸 하나하나 말하느니, 이미 만들어진 설명 속에 잠시 숨어버리는 편이 훨씬 쉬웠다. 그렇게 해석권을 타인에게 외주 주는 순간, 관계의 주도권 역시 조용히 넘어간다는 사실을 그땐 몰랐다.


우리는 종종 상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MBTI나 사주 같은 도구를 들고 온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도구들이 정교해질수록 사람의 실체와는 더 멀어진다. 한 사람을 바라보는 수고를 생략하고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잖아" 라는 문장으로 정리하는 순간, 관계의 거리는 더 이상 재기 어려운 값이 된다. 내가 내준 해석권으로 나를 재단하는 사람 앞에서, 우리는 결코 건강한 간격을 유지할 수 없다.


결국 관계의 거리는 누가 더 정확한 해석을 내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해석권을 쥐고 있느냐의 문제에 가깝다. 타인이 만든 유형과 팔자 안에 머무는 동안, 거리는 늘 상대의 확신에 따라 조정된다. 반대로 내 상태와 맥락을 내가 다시 설명하기 시작할 때, 관계의 간격은 조금씩 현실적인 위치를 찾는다.


여전히 누군가는 나를 냉정한 T로, 금수가 강한 사람으로 읽을 것이다. 그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다만 이제는 그 해석의 각주를 누가 다는지 정도는 내가 고르기로 했다. 나를 요약하게 두는 편안함 대신, 조금 피곤하더라도 나를 설명하는 쪽을 택하면서.


나라는 영토의 지도는 여전히 미완성이지만, 적어도 그 연필을 쥐고 있는 사람만큼은 분명해졌으니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30대 이후는 침묵의 서바이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