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지적해 주지 않는 나이
나이가 들수록 관계에서 말을 고르는 일이 잦아진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누군가의 행동을 보며 "이건 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어도 그 말을 삼키는 쪽을 택하게 됐다. 잘못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하고, 굳이 지적할 만큼의 관계도 아닌 장면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묘하게 마음에 남는다.
모임에서 자리에 없는 사람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안주처럼 오를 때가 그렇다. 악의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비밀을 공유하며 더 친해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그 자리의 모두가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이 끝나고 나면 공기가 미세하게 식어 있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 대신 각자의 기준선이 조용히 조정된다.
결혼식장에서 노출이 있는 밝은 원피스를 입은 하객을 본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누구도 직접적으로 뭐라 하지는 않았다. 다만 결혼을 앞둔 친구, 아직 미혼인 친구 몇 명이 잠깐 시선을 주고받으며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불쾌하다고 말하기엔 과하고,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넘기기엔 떨떠름한 얼굴들이었다.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지만, 이미 각자의 마음속에서는 어떤 평가가 시작된 뒤였다.
장례식에 맨발로 등장하거나 SNS에 올릴 육개장 사진을 찍는 사람을 봤을 때도 비슷했다. 대놓고 무례하다고 말하는 이는 없었지만, 그 행동은 애도의 자리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마음과 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그 침묵은 애도의 결여나 예의의 부재를 향한 집단적인 외면이자, 동시에 '저 사람의 자리는 딱 저기까지'라는 서글픈 선언이기도 했다.
이런 평가는 의외로 가장 사소한 식탁 위에서도 내려진다. 네 명이 앉은 식탁에 밑반찬으로 계란말이 네 개가 나왔다. 암묵적으로 인당 하나씩이라는 계산이 서는 순간이다. 그런데 누군가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며 자연스럽게 두 개를 집어 먹는다. 물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대신 그 사람은 다음 만남에서 조금 다른 눈으로 기억된다. 30대 이후의 평가는 대단한 철학이 아니라, 이런 한 조각의 배려에서 조용히 밑천이 드러난다.
어른들의 관계는 다정함으로 포장된 '침묵의 서바이벌'에 가깝다. 대놓고 화를 내거나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친절함은 사라진 지 오래다. 대신 사람들은 웃는 얼굴로 상대의 등 뒤에 조용히 선을 긋는다. 이 사람은 여기까지. 그 선이 그어지는 소리는 너무 작아서 당사자만 듣지 못한다.
20대까지만 해도 우리의 성장은 늘 소란을 동반했다. 부모의 질책, 선배의 훈수, 친구의 가감 없는 직설. 그 소음들이 때로는 귀찮고 아팠을지언정, 적어도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세상은 시끄럽게나마 나를 교정하려 애썼다. 그러나 30대의 문턱을 넘어서자 그 유익한 소음들이 거짓말처럼 소거되었다. 이제 내가 품위 없는 행동을 하거나 상식 밖의 궤도를 달려도 아무도 나를 붙잡아 세우지 않는다. 그저 미소 짓거나, 시선을 돌리거나, 조용히 멀어질 뿐이다.
이 장면들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다는 것. 30대 이후의 지적은 호의가 아니라 리스크가 된다. 성인에게 잘못을 말해주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감정 에너지를 요구한다. 자칫하면 모욕으로 받아들여지고, 질투나 공격으로 오독되기 십상이다. 말해줌으로써 얻는 보람보다 감수해야 할 관계의 마찰이 더 크기에, 사람들은 기꺼이 입을 닫는 경제적 선택을 한다.
문제는 지적이 사라졌다고 해서 판단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말 대신 침묵이 남고, 침묵 대신 기억이 남는다. 한 번의 사소한 행동이 설명할 기회 없이 축적되고,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은 어느 순간 굳어진다. 뜨거운 질타도, 명확한 경고등도 없다. 대신 관계의 온도가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내려간다. 이 미세한 변화가 가장 바로잡기 어렵다.
그래서 깨닫는다. 이 나이에 누군가 나에게 쓴소리를 건넨다면, 그것은 그가 나를 극진히 아끼거나 아니면 상당한 용기를 낸 경우라는 것을. 불편한 말을 성장의 재료로 쓰는 사람도 있지만, 그걸 감정싸움의 불씨로 삼는 사람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그 말, 듣고 보니 그런 면이 있었네"라고 말할 수 있는 유연함이 곧 그 사람의 그릇을 보여주는 기준처럼 느껴진다.
나 역시 늘 유연한 사람은 아니다. 날 선 피드백 앞에서 방어 기제가 작동해 속으로 욱할 때도 있다. 다만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라도 그 말을 다시 꺼내어 생각해 보려는 쪽을 택하려고 한다. 완벽하게 받아들이지 못해도, 아예 닫아버리지는 않기 위해서다. 그래서 가까운 지인에게 혹시 내 행동 중 어른스럽지 못한 부분이 보이면 솔직히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쉽지 않은 요청이라는 걸 알면서도, 듣기 싫은 말을 완전히 차단한 채 나이 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달콤한 찬사로만 가득한 세계에 머물고 있다면 한 번쯤 스스로를 의심해 봐야 한다. 내가 듣기 싫은 소리를 먼저 차단해 왔던 것은 아닌지, 혹은 사람들이 나를 포기한 것은 아닌지. 지적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자유가 아니라 고립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아무도 경고해주지 않는 세계에서 스스로를 점검할 수 있는 감각을 지켜내려 애쓰는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