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말속에서 발견한 나
가끔 타인의 반응이 나를 더 정확히 설명한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 정의하려는 노력보다, 의도치 않은 외부의 언어가 나라는 존재의 윤곽을 선명하게 그려줄 때가 있다. 남자친구가 "너한텐 거짓말을 못 하겠어"라고 말했던 순간이나, 친한 지인이 "내가 아는 여자애들 중에 네가 제일 무섭다"고 했던 말도 그랬다. 당시에 특별한 감정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반복된 반응 속에는 내가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았던 성향이 조용히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체감하는 부담감의 실체는 나의 말투나 직설성보다 깊은 곳에 있다. 바로 혼동을 극도로 싫어하는 기질이 낳은 관찰 방식, 반응 속도, 그리고 판단 구조의 조합이다. 나는 대상을 단순화하고 명료하게 인식하는 데서 안정감을 느낀다.
재직 시절, 오후까지 마쳐야 할 업무를 후임에게 맡겼을 때도 그랬다. 마감 시간이 다 되어 진행 상황을 물으니, 그제야 작업창을 부랴부랴 켜면서 "하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까 창 안 켜져 있던데. 방금 시작한 거죠?" 라는 내 질문에는 추궁도 감정도 없었다. 단지 눈에 보이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다만 이런 방식이 누군가에게는 차갑게 느껴졌을지 모른다. 나에게는 불필요한 비효율과 혼동을 걷어내는 과정이었을 뿐인데.
이런 관찰 습관은 인간관계에서 더욱 정밀하게 작동한다. 호인처럼 보이지만 행동의 리듬이 묘하게 맞지 않는 사람, 말투는 부드럽지만 계산이 빠르게 스치는 사람, 칭찬의 형태를 띠었으나 의도가 흐릿하게 번지는 문장. 나는 '착한 사람'이라는 외피를 신뢰하기보다 그 아래에서 미세하게 튀는 맥락의 부자연스러움을 먼저 포착하고 경고음을 듣는다.
누군가는 친절한 얼굴을 하고도 움직임의 속도가 너무 빨랐고, 누군가는 감정을 강조하면서도 말의 호흡이 어딘가 어색하게 끊어졌다. 그런 작은 어긋남들은 내게 이상할 정도로 선명했다. 그래서 상대가 불편해지는 순간도 있었다. "너랑 이야기하면 벌거벗겨지는 기분이 든다"는 피드백은, 내가 팩트를 공격적으로 제시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감추려던 균열의 징후를 내가 곧바로 포착하고 명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메커니즘은 애정 관계 안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말과 행동 사이의 작은 균열이 감지되면 '이 사람과는 리듬이 다르다'는 쪽으로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였을까. 서른 이후의 연애들은 종종 짧게 끝났다.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보다, 서로를 읽는 방식이 먼저 엇갈렸고, 나는 그 어긋남을 오래 붙들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삼십을 넘어서며 나는 내 직설을 조금 조절하려 노력했다. 한 템포 늦게 말하거나,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순간을 구분하는 정도의 변화는 생겼다. 하지만 근본적인 인식 구조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말보다 패턴을 먼저 보고, 표정보다 맥락을 먼저 읽는다. 타인의 말 사이에서 공백을 먼저 듣고, 필요하다면 거리를 둔다. 이건 성격이라기보다 오래 체화된 관찰의 방식이다.
나는 나 자신을 유난히 냉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오래 지속된 관찰 습관이 어느새 하나의 방식으로 남아버렸을 뿐이다. 누군가 나를 '무섭다'고 평가할 때도 이제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그 말의 안쪽에는 "너는 흐릿하게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야"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한 이 거리감은 누군가에게는 냉기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편안한 숨의 간격, 정확함 속에서의 안식처이다. 그 간격 안에서 나는 조금 더 정확히 보고, 덜 휘둘리며, 그럭저럭 나다운 방식으로 살아간다. 이 거리감은 나를 고립시키는 벽이 아니라, 세상을 더 선명하게 이해하게 해주는 투명한 장치다. 나는 그 장치 안에서 비로소 안정적으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