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이라는 이름의 고해상도
내 입으로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라고 규정하는 것을 꽤나 민망해하는 편이다. 솔직히 말하면, 속된 말로 좀 ‘짜친다’고 생각한다. 그 문장 하나로 설명될 만큼 나는 단순하지도, 그렇다고 확정적이지도 않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타인이 나에게 건네는 칭찬이나 판단조차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혹시 내가 나 자신을 과대평가하게 될까 봐 일단 한 발짝 물러서서 경계하곤 했다.
SNS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5년 전의 글을 발견했다. 그때도 나는 지인에게 들은 평가를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사람들이 본인에 대해 "나는 촉이 좋다", "나는 사람을 잘 본다"라고 자화자찬 하듯이 말하는 것을 꽤 자주 본다. 그리고 그리 말하는 이들 중 과연 어느 정도가 실제로 촉이 발달한 사람일지 궁금하다.
사람을 잘 꿰뚫어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을 많이 겪어보지 않았어도 이미 그 사람의 줄기를 파악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사람을 잘 보려면 같은 시간동안 보더라도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는 예리함, 예민함이 필요할 것이다. 그 사람을 미시적으로 다 해체하지 않아도 직관이 어느 순간 본인이 수집한 정보들을 관통하는 판단으로 이끌어 주겠지.
그렇다면 비교적 젊은 나이의 인생 경험의 절대적인 양이 부족한 사람이라도 그 부족한 경험의 공백을 발달한 직관이 메워줄 수 있을까?
나의 경우 내 촉이 발달했다기보다는 30년 세상 경험을 하면서 자연적으로 생긴 예리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내가 예상한 대로 일이 풀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사실 생각해보면 내 경험에 비추어 판단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촉보다는 '이러이러한 것은 대개 이렇게 될 것이다' 하는 경험 데이터가 확률적인 결과를 생각하게끔 한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촉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꽤 위험할 수 있다. 자신의 직관을 과신해서 누군가의 특성을 멋대로 규정하고 일반화 시켜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의 주관적인 감각에 의존한.. 어찌보면 고정관념이라 생각한다.
얘기를 하다보니 중구난방이 되어버렸지만.. 지인으로부터 들은 "하윤씨는 참 촉이 좋아"라는 말에 '대체 나의 어딜 보고 그런 얘기를 하는 건가' 궁금해 하다가 갑자기 급 이런저런 생각이 몰려와서 끄적여 본 글이다.
2021.10.15
5년 전의 나는 내 감각을 통계로 치환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던 것 같다. 사람을 잘 보는 게 아니라 그저 경험의 데이터 덕분이라며 공을 세월에게 돌리고 있었다. 그것이 오만해지지 않기 위한 나만의 안전장치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흐른 지금, 그 글에 짧은 주석을 덧붙이고 싶어졌다. 지난 몇 년 사이 지나온 장면들이, '촉'이라는 단어를 다른 각도에서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일하던 시절, 모니터 속 1픽셀의 어긋남은 유독 내 눈을 잘 피해 가지 못했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화면에서도, 시선은 이상하게 그 미세한 틈에 멈춰 섰다. 간격이 살짝 어긋난 곳, 정렬이 애매한 지점. 그때마다 수정 요청을 하면 돌아오는 말은 늘 비슷했다. "정말 예리하시네요." 당시에는 칭찬으로 받아들이려 애썼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에는 묘한 피로감도 함께 섞여 있었던 것 같다.
관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말로 드러난 내용보다 말끝이 흐려지는 순간이나 표정의 미세한 변화가 더 크게 다가오곤 했다. "그 사람의 말은 사실 이런 의도 아니었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던지고 나서, 정작 나도 왜 그런 생각에 이르렀는지 설명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특별한 통찰을 발휘했다기보다는, 그냥 지나치지 못한 것들이 쌓여 있었던 느낌에 가까웠다.
브런치에 관찰 에세이 <사람에겐 다 이유가 있다>를 연재하면서, 그 사실을 더 또렷하게 체감했다.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대상을 쪼개고, 말과 행동을 다시 들여다보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내 시선이 세상을 꽤 미세한 단위로 분해하고 있다는 걸.
그제야 예전에 들었던 말들이 조금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촉이 좋다", "사람을 잘 본다"는 표현은, 미래를 내다본다는 뜻이 아니라 어쩌면 남들이 하나로 넘기는 장면을 여러 조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의미였을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내 감각은 덩어리보다는 입자에 더 잘 반응해왔다. 표정의 미세한 변화, 화면 속 미세한 오차, 단어 선택의 뉘앙스 같은 것들. 그런 디테일들이 내겐 고해상도로, 그것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망막에 꽂히곤 했으니까. 그 결과 내 기억은 언제나 자잘한 정보들로 채워졌고, 시간이 지난 뒤 어떤 상황 앞에서 "예전에 비슷한 장면을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라는 감각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게 늘 편한 감각은 아니었다. 흘려도 될 것들이 흘러가지 않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들이 자꾸 걸렸다. 예민하다는 건 선명하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쉽게 지운다는 게 잘 안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달리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작동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제 와서야 5년 전의 칭찬을 조금 다른 마음으로 받아들여 본다. 그 말은 더 예리하다는 찬사가 아니라, 눈에 밟히는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느라 피곤했을 나의 예민함에 대한 위로이자, 인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