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순간
캐리어 지퍼를 끝까지 열어젖히고 옷가지들을 서랍에 대충 밀어 넣었다. 열 시간 넘는 비행 끝에 몸은 이미 현실감이 희미했다. 짐을 다 풀고 나서야 비로소 정적이 밀려왔다. 낯선 방, 생경한 감촉의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는데 문득 세상의 모든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깨웠다. ‘밀어서 잠금해제’라는 문구 위로 손가락을 튕기자 낯선 도시의 숫자가 툭 튀어나왔다. 시계는 용케 이곳의 속도를 따라잡았는데, 왼쪽 상단엔 여전히 ‘검색 중..’이라는 무력한 글자만 깜빡였다. 3G도, 와이파이도 잡히지 않았다. 그 기계로 할 수 있는 일은 시간 확인 정도뿐이었다.
창밖으로는 회색과 푸른 눈의 사람들이 무심하게 지나쳤고, 복도 너머에서는 필리핀계 집주인 여자의 낯선 억양이 들려왔다. 나는 아직 이곳의 학생이 아니었고, 이곳에서는 누군가의 딸도, 친구도 아니었다. 전원만 켜진 채 신호를 잡지 못하는 스마트폰 화면이 꼭 스스로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나는 지금도, 그때처럼 내가 발 디디고 있던 세계가 달라지던 순간을 떠올린다. 숨 가쁘게 오르내리던 학교 언덕을 졸업식 날 마지막으로 내려올 때. 콘서트가 끝나고 공연장 문이 등 뒤로 닫힐 때. 방금 전까지 내가 그 안에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세계는 순식간에 저편으로 물러나고, 나는 바깥으로 밀려나 있다. 마치 눈 앞에 얇고 투명한 막이 생겨버리는 감각. 애도하기엔 추상적이고, 붙잡기엔 이미 실체가 없다.
그 멜랑콜리 안에는 자신에 대한 낯섦이 섞여 있다. 저 안에 박혀 있던 나와 지금 여기 홀로 남은 나 사이의 미묘한 간극. 나를 정의해주던 것들 — 역할, 소속, 관계 — 이 한순간에 증발한 자리에는 이름 없는 무중력이 남는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줄 사람도, 나를 알아볼 맥락도 없는 곳에서, 나는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
홀가분하기보다 서늘한 건, 이 상태가 해방이 아닌 일시적인 고립이어서다. 이쪽 세계를 빠져나왔는데 저쪽 세계엔 아직 닿지 않은 그 좁은 틈.
허공에 뜬 채 가장 맨얼굴의 나와 마주하는 시간. 그것이 공포로 번지지 않는 건, 이 허공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몸이 먼저 알아서일 것이다. 곧 다시 착지할 것이고, 새로운 명찰을 달고 다음 세계로 편입될 것이다. 그러니 이 이탈은 추락이 아니다. 정지 화면이다. 다음 장면이 시작되기 직전의.
인간은 어쩌면 평생 경계 위를 서성이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하나의 세계가 닫히고 다음이 열리기 직전, 그 좁은 틈에서만 만날 수 있는 날것의 나. 그 순간이 드러내는 건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다. 내가 발 딛고 살아온 수많은 세계가 사실 얼마나 얇은 맥락들로 이루어져 있었는지, 그 가벼움이다.
신호를 잡지 못한 채 깜빡이던 오래전 그 방의 고요처럼 — 맥락 없이 허공에 떠 있는 순간이야말로, 내가 나에게 가장 가까워지는 시간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