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바다, 포지타노에 남긴 마음
포지타노에서 보낸 사흘 동안, 카프리섬에 다녀온 하루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느릿하게 보내며 풍경을 바라보는 데 썼다. 이곳에서는 굳이 어디를 가야 한다는 압박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조급함도 없었다. 따뜻한 햇살, 반짝이는 해변, 아기자기한 거리와 계단, 그리고 눈부신 하늘.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된 여행 같았다.
처음에는 낯선 풍경 앞에서 뭔가를 기록해야 할 것 같았고, 효율적인 동선을 따져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강박은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허물어졌다. 포지타노는 그런 계산을 무력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그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각이 채워지고,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있더라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여행은 결국, 채우는 일이 아니라 비우는 일이라는 걸 이곳에서 새삼 느꼈다.
이곳에서는 작은 순간조차도 특별하게 다가왔다. 어떤 날은 절벽 위 테라스에 앉아 페로니를 홀짝이며 석양을 바라보았고, 어떤 날은 바다를 내려다보며 시원한 레몬셔벗을 한 스푼씩 떠먹었다. 특별한 이벤트가 없더라도, 시간을 느리게 보내는 일상 자체가 이곳에서는 충분히 가치 있었다. 그냥 바라보고, 느끼고, 숨 쉬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날들. 오랜만에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정당화할 수 있었고, 오히려 그게 이 도시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식이었다.
특히 낮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시간대가 좋았다. 햇살이 조금씩 누그러지고, 공기 속에 살짝 선선한 바람이 감돌 때. 맥주 한 캔을 손에 쥐고 바다를 내려다보는 순간은, 이 여행의 모든 것이 응축된 장면 같았다.
한 모금 넘길 때마다 이 도시의 낭만이 고스란히 목을 타고 스며드는 기분이었달까. 햇살이 남긴 여운, 반짝이는 물결, 그리고 서서히 붉어지는 하늘.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지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현실이 잠시 멈춘 듯한 착각이 들었다.
혼자서 마시는 맥주가 이렇게 좋았던 적이 있었나. 익숙한 술맛도, 낯선 풍경 속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원래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이곳에서 마시는 페로니는 유난히 맛있었다. 이곳에선 술쟁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맥주의 톡 쏘는 청량감, 지중해의 짭조름한 바람, 피부에 살짝 감기는 습도까지. 그 조합이 만들어낸 순간은, 짧지만 완벽했다.
이탈리아 남부에서 레몬은 단순한 과일을 넘어 하나의 상징 같은 존재다. 레몬 마을이라 불릴 만큼, 어디를 가도 노란빛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노란 셔벗을 입에 넣으면, 얼음처럼 시원한 질감 뒤로 달콤하면서도 살짝 씁쓸한 뒷맛이 따라온다. (사실 나는 그 쓴맛 때문에 몇 입 먹고 내려놓았지만, 그 몇 입만으로도 여운은 충분했다.)
눈앞에는 푸른 바다, 손끝에는 시원하게 녹아내리는 레몬 셔벗. 바람과 파도 소리, 피부에 닿는 공기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어우러져, 마치 한 장의 엽서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날들이었다. 욕심내지 않아도,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그 순간은 자연스럽게 마음에 새겨졌다.
지금도 떠올리면, 혀끝에 살짝 시큼한 레몬 향이 감도는 것만 같다.
10월 초의 포지타노는 정오가 지나면 햇살이 충분히 따뜻해진다. 늦가을이라기엔 믿기 힘들 만큼, 하늘은 맑았고 공기엔 여름의 잔재가 살짝 남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낮 시간 해변에 나가보면 선베드 위에서 책을 읽는 사람, 파라솔 아래에서 조용히 낮잠을 청하는 여행자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누군가는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고 있었고, 누군가는 셔츠를 벗고 태닝 오일을 바르는 중이었다. 모두가 잔잔한 파도 소리와 함께 이곳의 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포지타노는 단순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곳이었지만 이왕이면 선베드에 누워 파도 소리를 더 가까이서 듣고 싶었다. 그래서 나도 그 여유로운 대열에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타올을 펴고, 선크림을 바르고, 눈을 가린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처음엔 다소 어색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이곳 사람인가?’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물론 같은 시기에 한국에서 선베드를 펼쳐놓고 수영복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긴다면 아마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따뜻한 이탈리아 남부이므로. 그저 자연스럽게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피부에 닿는 따스함을 즐기면 될 뿐이었다.
다만 낮의 햇살에 속아 24시간 내내 여름처럼 훌렁 벗고 다니면 곤란하다. 이곳의 날씨는 생각보다 꽤나 양면적이다. 아침저녁으로는 얇은 가디건 하나 없으면 꽤 쌀쌀했으니까. 그러니 이곳에서는 한낮엔 여름, 해 지면 가을. 계절을 두 개쯤 겹쳐 입는 요령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10월의 포지타노는 분명 여름보다 더 여름 같았다는 것이다.
해가 저물고, 포지타노에서의 마지막 밤이 시작되었다.
일부러 절벽 가장 위까지 올라가 바라본 풍경. 그곳은 마치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는 조용한 관람석 같았다. 멀리서 본 이 도시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무리처럼 보였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그 순간, 도시가 잠들기 전의 숨을 고르는 듯한 고요함이 있었다.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하늘, 연한 분홍빛과 푸른빛이 섞인 저녁노을. 색과 색이 스미는 경계는 너무도 자연스러워, 어디서부터 밤이 시작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절벽을 따라 촘촘하게 들어선 집들은 하나둘 불을 밝히기 시작했고, 그 불빛은 마치 물결처럼 산비탈을 따라 흘렀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밤이 도시를 채워가고 있었다. 그 빛들은 마치 포지타노의 밤을 위한 무대를 완성하는 듯했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이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이라니.. 3일이 너무 짧았다. 어쩌면 며칠을 더 머물렀다 해도 이곳을 떠나는 순간은 늘 아쉬웠을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머무는 시간 동안, 오가면서 호텔 근처에 있는 이 옷가게 근처를 여러번 스쳐지나갔다.
그 가게 앞에서 나를 유독 사로잡았던 원피스. 포지타노의 여름과 닮은 가벼운 소재의 원피스였다. 치맛단에는 조개와 불가사리, 해초 같은 바다를 연상시키는 디테일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야말로 휴양지 느낌이 가득.
원래 살까 말까 고민이 들면 사지 않는 게 맞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고민이 세 번을 넘어간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고, 두 번째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고, 세 번째에는 결국 멈춰 서서 손끝으로 천을 살짝 만져보았다. 이미 마음이 기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40유로라는 가격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결국 마지막 날 저녁에 덜컥 사버렸다.
아마 이 원피스를 입을 때마다 이탈리아 남부의 태양과 바람, 그리고 망설이던 끝에 구매했던 그 순간까지 떠오르겠지.. 생각하면서. (물론 그 옷은 30대가 되면서 ‘이렇게 짧았나?’ 싶은 민망함과 함께 옷장 한 켠으로 밀려났고, 결국 조용히 퇴장당했다.)
마지막 날 밤은 선착장 바로 앞에 있는 작은 가게를 찾았다. 그날 산 새 원피스를 입고서.
그리고 마지막 밤을 기념하며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자리를 잡고 앉자 잔잔한 파도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고, 바삭한 깔라마리 튀김이 안주로 함께 나왔다. 바다를 바라보며 맥주를 한 모금씩 넘길 때마다, 이 여행이 끝나간다는 사실이 아쉬움처럼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 여행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좋았을 텐데..'
포지타노를 사흘이나 묵기로 결정했을 때만 해도 일정이 빡빡해질까 고민했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망설임이 무색할 만큼 아름다운 밤이었다. 단 몇 시간이라도 이 밤을 더 붙잡을 수 있다면, 기꺼이 시간을 끌어안고 싶었다.
이날은 금요일이었다. 그 말은 즉, 다음 날은 주말인 셈이다. 원래라면 하루를 마무리할 때마다 늘 통화하는 상대가 있었지만, 이탈리아에 있는 동안은 그럴 수 없었다. 시차 때문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하루의 끝을 맞이할 무렵이면 한국은 이미 새벽 세 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아무리 익숙한 사이라도 그 시간에 전화를 거는 건 민폐였다. 그래서 여행 내내 그 사람과 나는 카톡으로 짧은 메시지를 주고받았고, 밤이면 나 혼자 조용히 하루를 복기하며 잠드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어차피 내일은 쉬는 날이니까, 대수롭지 않다는 듯 스마트폰을 꺼내 영상 통화를 걸었다. 조금 기다리니 오랜만에 익숙하고도 반가운 얼굴이 등장했다. 스마트폰 화면 너머로 졸린 눈을 비비고 있는 가여운 사람.
내가 너무 반가운 나머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을 때, 그는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조용히 내 수다를 받아주었다. 나는 별다른 서두 없이 이야기를 풀어놨다. 카프리에서의 하루, 거리에서 나에게 일본어로 말을 걸던 사람, 포지타노 밤의 풍경까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나는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마음껏 말을 걸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마치 그동안 마음속에 고이 눌러뒀던 단어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사실, 출국 전 그는 몇 번이나 혼자 여행이 무서우면 같이 가주겠다고 말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길을 잃을 걱정도, 낯선 곳에서 어색한 순간도 없었겠지. 그럼에도 나는 끝까지 혼자 가는 걸 고집했었다. '혼자 떠나는' 이탈리아 여행이 오래전부터 나의 버킷리스트였으니까.
통화 말미, 그는 하품을 참으며 느릿한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물었다.
"너 이렇게 말이 많은 걸 보니 떠들고 싶었나 봐. 사실 혼자 온 거 후회하지?"
나는 맥주 한 모금을 넘기고, 화면을 보며 곧장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무 좋았어."
다음 날 아침, 포지타노에서의 마지막 풍경을 바라보며 체크아웃을 마쳤다. 이제 다음 도시로 이동할 시간이었다. 나는 미리 예약해둔 여행 업체의 밴을 타고 나폴리로 향하기로 했다.
숙소 앞 골목에 도착한 밴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예상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벤츠 로고가 선명히 박힌 밴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런 이동수단이 일반적인 걸까, 아니면 내가 생각보다 좋은 차량을 예약했던 걸까. 문을 열고 탑승하니 여유 있는 좌석과 깔끔한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에어컨 바람은 선선했고, 무엇보다 창이 커서 바깥 풍경이 잘 보였다.
밴은 곧 조용히 출발했다. 창밖으로는 포지타노의 골목과 계단,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천천히 멀어져갔다. 익숙해질 틈도 없이 이렇게 떠나야 한다는 게 아쉬웠다. 짧다면 짧은 3일이었지만, 그 안에 이 도시를 좋아하게 될 만한 이유들이 충분히 담겨 있었다.
차는 굽이진 해안도로를 따라 부드럽게 달렸다. 창가 너머로 펼쳐지는 지중해의 수평선, 절벽 위에 기적처럼 매달린 집들, 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올리브 나무와 레몬나무들. 창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은 마치 느릿하게 감기는 필름 같았다. 포지타노의 풍경은 떠나는 순간까지도 황홀했다.
마음 한켠이 뻐근했다. '조금만 더 머물면 안 될까?'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 아쉬움이야말로 여행이 끝났다는 징표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포지타노에 작별을 고했다. 꿈처럼 반짝였던 며칠, 그 시간들을 가만히 가슴속에 눌러 담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