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리, 기억은 하루보다 오래 남는다

햇살과 젤라또, 그리고 푸른 섬의 하루

by 그냥 하윤

# 카프리로 가는 길, 작은 호사 하나


포지타노에서의 두 번째 날 아침, 나는 선착장에서 페리를 타고 카프리로 향하기로 했다.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아침의 선착장엔 여행자들이 하나둘 모여 있었고, 그 틈에서 나는 뜻밖의 인연을 만났다.


선착장의 귀염둥이. 이곳의 진짜 주인은 너일지도


살가운 성격의 리트리버 한 마리가 마치 이곳의 터줏대감처럼 여유롭게 사람들 사이를 오갔다. 맑은 눈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데, 처음 보는 개와의 첫 인사치곤 너무 자연스러웠다. 그 아이는 선착장의 작은 주인 같았고, 나는 어느새 손을 뻗어 쓰다듬고 있었다.


보드라운 털에 손을 묻히며 한참을 장난치다 보니, 우리 집 상전 달이가 문득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아직 팔팔하던 우리 집 강아지. 지금은 어느새 할배가 되었지만, 이 사진 속 리트리버도 시간이 흘렀을 지금쯤 어디선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다. 잠깐이었지만, 낯선 여행지에서 마주한 생명의 따뜻함이 기분 좋은 여운을 남겼다.


포지타노에서 카프리 9시 출항. 설렘도 함께 실었다.


그리고 이 털복숭이 친구와의 작별이 아쉬워질 즈음, 멀리서 부우웅- 하고 페리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리트리버의 머리를 쓰다듬고, 천천히 배에 올랐다. 부두에서 멀어지는 페리 위에서 나는 고개를 돌려 점점 작아지는 선착장을 바라봤다.


섬이 그려낸 풍경화 같은 첫인상. 카프리 입항


카프리로 향하는 페리는 천천히 바다를 가르며 나아갔다. 멀리서부터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하얀 집들과 파스텔톤 건물들, 그리고 그 뒤로 병풍처럼 둘러선 절벽의 실루엣. 햇살에 부서지는 바다의 반짝임 위로, 섬은 마치 손으로 그린 풍경화처럼 차츰 다가왔다.


섬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나는 이미 마음 한켠을 이곳에 내어주고 있었다. 아직 걸어보지도 않은 길 위에서, 나는 벌써부터 이 섬의 매력에 깊이 스며든 느낌이었다.


혼자 택시를 탈 것인가, 버스에 서서 갈 것인가.


카프리에 도착한 후, 나는 생각해둔 일정대로 아나카프리로 바로 이동하기로 했다. 대중교통으로는 버스를 이용할 수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과감하게 프라이빗 리무진 택시를 선택했다. 가격만 놓고 보면 거의 서울에서 대구까지 가는 고속버스 수준. 평소 같았으면 두세 번은 고민했을 금액이었지만, 출국 직전까지 2주 연속 야근에 시달렸던 나에게 이 정도 사치는 허락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꼭 필요했던 선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선택은 결론적으로 옳았다.


지중해 바람과 함께한 드라이브.


오픈카로 된 택시는 달리는 내내 시원한 바닷바람을 실어 나르며, 눈앞에 펼쳐진 지중해의 풍경을 더욱 근사하게 감상할 수 있는 ‘움직이는 전망대’였다. 기사 아저씨가 틀어준 노래는 제이슨 므라즈의 I’m Yours. 한동안 잊고 지냈던 멜로디였지만, 신기하게도 이 섬의 분위기와 찰떡같이 어울렸다.


지중해의 바람을 맞으며 듣는 이 노래라니, 잠깐의 여유가 전부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 세상의 꼭대기에서


잠깐 하늘로 다녀올게요. 왕복으로요!


아나카프리에 도착한 후, 이번에는 몬테 솔라로 전망대로 향했다. 몬테솔라로 정상까지는 1인용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야 했다. 빠르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묘하게 낭만적인 속도로, 나를 천천히 하늘 가까이로 데려가는 방식이었다.


두 다리는 허공에 매달린 채, 잔잔한 바람을 맞으며 풍경을 바라보았다. 말없이 흘러가는 시간, 그 고요함 속에서 생각이 많아졌다.


리프트는 눈치껏 타이밍 맞춰 엉덩이부터 착석해야 한다.


올라가는 길에 문득 가족들이 떠올랐고, 이 풍경을 나만 보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은 이제 오후쯤이겠지.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엄마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신호음 몇 번 뒤, 화면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와, 진짜 예쁘다! 날씨도 너무 좋네!"

엄마의 감탄이 화면 너머에서 들려왔다. 곧이어 언니가 카메라 앞으로 성큼 다가오더니 "달이 보여줄까?" 하며 스마트폰을 강아지 쪽으로 돌렸다. 달이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화면을 쳐다보며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요?’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얘가 뭘 알겠냐마는, 그래도 귀여웠다.


익숙한 얼굴들이 스마트폰 너머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여행지의 하늘 아래서, 익숙한 얼굴들과의 작은 연결. 아무 말 없이 하늘을 오르던 리프트 안에서, 아주 잠깐이지만 일상과 여행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을 느꼈다.


세상의 꼭대기에서 바라본 수평선. 경계가 사라진 순간
절벽 아래 푸른 바다.


그렇게 마침내 몬테 솔라로 전망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나는 말 그대로 ‘섬이 내려다보인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경계가 없는 풍경, 수평선 근처에서 하늘과 바다가 자연스럽게 겹쳐지고 있었다. 눈이 시릴 만큼 쪽빛으로 물든 바다 위로는 작은 배들이 점점이 흩어져 떠 있었고, 그 모습이 마치 누군가 푸른 물감을 한껏 머금은 붓으로 세상을 채색해버린 것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세상의 꼭대기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신은 아니지만 이 정도의 뷰엔 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전망대 한편, 카페테리아처럼 보이는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곳에서는 소매치기 걱정도 없겠지 싶어, 삼각대를 꺼내 이리저리 세워가며 제대로 된 사진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건진 사진을 가족 채팅방에 보내자 언니가 말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 배경 같네.”


정말 그랬다. 푸른 하늘 아래 놓인 돌기둥, 꽃으로 장식된 항아리까지. 고대 신전의 한 장면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풍경이었다. 물론 나는 신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신들이 휴가를 보내러 올 법한 곳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어느 중국인 언니가 찍어준 뒷모습





# 노천 테이블과 낯선 유쾌함


몬테 솔라로 전망대를 구경한 후 나는 아나카프리 시내로 넘어왔다. 이곳 역시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손으로 정성껏 만든 수공예품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반짝이는 비즈 장식의 악세서리와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들어진 플립플랍(쪼리)는 보기만 해도 여름의 색감이 물씬 느껴졌다.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내가 쪼리를 불편해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쉽지만 패스.


보기만 해도 여름의 기운이 발끝부터 전해졌다.
빨간 모자 요정들이 줄지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신 친구들과 직장 상사에게 줄 작은 기념품들을 골랐다. 카프리 특유의 푸른 바다와 절벽이 그려진 엽서, 그리고 냉장고에 붙이면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줄 마그넷은 이곳의 여운을 담아 전하기에 딱 좋은 것들이었다.


기념품을 하나씩 손에 들고 나는 다시 아나카프리의 골목을 걸었다. 그리고 그제야 조금 배가 고파졌다.



여기저기 식당을 둘러보다가, 카프리의 절벽이 시원하게 펼쳐지는 야외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유럽까지 와서 노천카페 감성을 안 누리고 가면 섭하다는 마음에 자리를 잡았다. 게다가 살랑이는 지중해의 바람까지 더해진 완벽한 날씨였으니, 이런 풍경과 공기 아래에서는 사실 뭘 먹어도 맛있을 것 같았다.


카프리 한복판, 노천카페의 오후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결국 하몽과 치즈가 올라간 미니 피자를 주문했다.


내 주문을 받아준 건 이 식당에서 제법 연차가 있어 보이는, 말하자면 '왕고' 포지션의 서버였다. 이탈리아 사람 특유의 너스레와 살가움이 잔뜩 묻어나는 태도였는데, 말투와 제스처만 봐도 어딜 가든 금방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굳이 MBTI로 빗대자면 ESFP 느낌이랄까, 거침없고 붙임성 좋은 그 전형 그대로였다.


그 서버는 어디서 온 거냐는 질문부터 시작해, 이 섬에서 살고 싶지 않냐는 농담까지 능청스럽게 던졌다. 그렇게 가벼운 대화가 오가는 사이 분위기도 한층 유쾌해졌다. 다소 딱딱하고 정적인 분위기였던 로마에서의 식사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낯선 곳에서 마주한 유쾌한 점심시간이었다.


그리고 셀카를 찍으려고 휴대폰을 들고 있던 순간, 그 서버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툭 하고 내 옆에 끼어들었다. 위의 사진은 그래서 남게 된 투샷이다..


이탈리아에서는 혼자 식사하는 여행자가 오히려 더 눈에 띈다고 했던가. 자연스럽게 말을 걸고, 농담을 주고받고, 어느새 사진 속에까지 함께 등장하는 사람들. 내향인인 나로서는 다소 낯설고도 신기한 경험들이었지만, 덕분에 혼자 먹는 식사가 전혀 심심하지 않았다.


아마도 살면서 다시 만날 일은 없을 사람이겠지만, 나는 이 즉흥적인 투샷을 내 여행 사진첩 한 켠에 조용히 담아두었다.





# 돌아가기 전, 마지막 공기 한 조각


햇살이 흘러내리는 골목길, 어디로 가도 그림 같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슬슬 달달한 디저트가 당겼다. 미리 트립어드바이저에서 찜해둔 부오노코레 젤라테리아가 떠올라 자연스럽게 발길을 돌렸다. 이곳은 와플콘을 즉석에서 구워주는 젤라또 가게로 유명한데, 가까워질수록 어김없이 고소한 와플 향이 바람을 타고 퍼져왔다. 방향을 잘못 잡았나 싶다가도, 그 향이 코끝에 닿는 순간 ‘아, 이 근처구나’ 싶은 확신이 들었다.


지하철역 근처에서 델리만쥬 냄새가 나면 자연스레 고개를 돌리게 되는 것처럼, 이 골목을 지나던 사람들도 하나같이 와플 향에 이끌리듯 고개를 돌려 가게를 바라보고 갔다. 눈으로 본 것보다 냄새가 먼저 마음을 사로잡는 순간이었다.


젤라또는 사랑에 빠지는 속도마저 빠르다. 첫 입에 이미 끝!


내 차례가 되어 갓 구운 와플콘을 손에 쥐자, 따뜻하면서도 바삭한 감촉이 손끝에 전해졌다. 그리고 그 위에 얹힌 차갑고 부드러운 젤라또. 뜨거움과 차가움, 바삭함과 부드러움이 동시에 입안에서 녹아내렸다. 이 조합이 맛이 없을 리가 없지. 달달한 한 입에 얼굴이 절로 풀어졌다.


역시 디저트는 늘 그렇듯, 여행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작은 한 알에 담긴 이탈리아 남부의 달콤함.


선착장으로 돌아올 때는 조금 더 이색적인 체험을 해보고 싶어 푸니쿨라를 타고 내려왔다. 기울어진 레일을 따라 섬의 높은 지대에서 천천히 내려가는 여정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펼쳐지는 카프리의 절벽과 푸른 바다는 정말 절경이었다. 가파른 경사를 따라 내려가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경계를 계속 바라봤다. 그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지만, 붐비는 탓에 차마 카메라를 꺼내지 못했다. 대신 눈과 기억 속에 조용히 담아두었다.


색색의 건물과 나란히 정박한 보트들.
다시 올 날이 있을까.


포지타노로 돌아가는 페리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선착장 주변의 작은 상점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무것도 사지 않아도 좋았고, 그냥 걷기만 해도 충분히 좋았다. 어쩌면 이곳에서의 마지막 순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발걸음을 서두르지 않았다. 카프리의 공기, 바람, 그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까지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천천히 풍경을 음미했다.


낯선 섬에서의 하루가 이렇게 흘렀다. 짧았지만, 충분히 선명한 기억으로 남을 시간이었다.


이제 다시 포지타노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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