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로 여행을 통한 평화구축"
그냥 꿈이었다. 꿈이려니 했다.
어쩌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꿈.
해외 대학원에서 멋진 교정을 거닐며 기뻐서 발레 하 듯 점프하는 모습을 하루에도 몇 번씩 상상해 댔어도 이 꿈은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런 흔한 꿈 중의 꿈 하나. 그래도 도서관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영어 공부를 하고 영어시험을 치며 언젠간 이루어 질지도 모를 이 꿈을 준비했었다.
포기하지 않아서였을까, 아님 꿈은 원래 이뤄지라고 있는 것이어서 일까.
나는 정말로 영국 대학원에 입학하여 어느 순간 도서관에 박혀 에세이를 '쓰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진짜로 첫 번째 꿈이 이루어지다니
9월 중순에 시작해 다음 해 5월 초에 끝이 나는 영국의 대학원. 그 시간 동안 우리가 주로 하는 일은 강의를 듣고 혼자 끙끙 앓으며 에세이나 리포트를 '쓰는' 일이었다. 따로 시험을 보지는 않고 강의와 담당 교수의 튜토리얼을 바탕으로 혼자 연구하고 책을 읽으며 자료를 모아서 '쓰고' 또 '쓰고' 하는 것이 영국 인문 대학원 교육의 방침이었다. 무언가를 쓰는 일이 이렇게 많은 책을 찾아 보고 생각하고 그런 일이었는지 영국 대학원에 입학하기 전에는 절대 알지 못했었다. 통상 한 가지 주제의 에세이를 쓰면서 참고한 레퍼런스는 대략 30여 권.' 쓰는 것'이 참 고통스러웠다. 특히 처음에는 더더욱. 우리들은 아침 9시경 도서관으로 집합해 에세이와 리포트를 써댔으며, 중간중간 수업이 있는 시간을 빼놓고는 거의 도서관에 붙어살았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 점심, 저녁 모두 도시락을 싸와서 점심시간과 저녁시간이면 도서관 지하 식당에 모여서 밥을 먹으며 수다도 떨으며 '쓰기'에 대한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우리는 우리를 도서관 친구라 칭했다
사실 나는 대학원 초기 4-5 개월간은 친한 친구가 없었다. '쓰는' 것도 주로 수업이 끝나면 기숙사 방에 혼자 박혀서 어떻게 하면 학점이 잘 나올 수 있을까 고민했다. 어찌 보면 정말 외로웠던 나날들이었던 것 같다. 특히 첫눈이 내리던 기숙사에서 혼자 있던 밤에는 더더욱.
그러다가 우연히 도서관에 학과 친구들이 모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나도 그들의 '쓰기'에 합류하였고 그렇게 나는 그들과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도서관 친구가 생김과 동시에 바닥을 기던 나의 학점들도 쑥쑥 올라가기 시작했다. 도서 관에 가지 않고 기숙사 방에 혼자 있으면 딴생각을 하거나 한국 연예 방송을 보기 일쑤였고 시간이 허망하게 흘러갔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마술봉과 함께 했던 조 발표
졸업은 그 해 12월 초가 되고 논문은 최소한 9월 말까지 제출해야 하는 시스템이다. 논문을 '쓰는' 기간은 총 5개월가량으로 사실 5월 초까지 논문 작성에 대한 대략적인 기획안을 학교에 제출해야 하기 때문에 논문 주제는 반드시 5월 초까지는 정해져야만 한다.
어떤 학생들은 입학 전부터 논문 주제를 이미 정하고 들어오기도 한다. 나는 사실 논문 주제를 정하는데 너무 어려웠다. 왜냐하면 늘 학문에서도 '재미'를 찾아대는 성격 탓에 재미없고 지루한 주제의 논문은 한 글자도 쓰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학원 시절에 친하게 지냈던 일본 친구 유타는 1월 초에 논문 주제가 드디어 정해졌다며 페이스 북에 포스팅을 했다. 긴장됐다. 사실 내가 논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때가 바로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과연 무엇을 써야 '재미' 있을까. 그동안 우리가 배워온 수업은 죄다 평화, 분쟁과 개발에 관한 내용이었다. 간혹 창조적인 프로젝트의 예시도 공부했지만 아무래도 학문이었기에 딱딱하고 심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런 형식적인 내용 볻는 뭔가 창조적이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들어간 논문 작성을 원했다.
그러던 중 조를 편성하여 조 발표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나의 절친이었던 스페인에서 온 에듀와 일본에서 온 마유와 셋이 조를 편성하여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의 다이아몬드 전쟁에 대해 발표하기로 했다. 발표 전에 유명인사들의 강의에 대해 유부트로 조사를 해보았더니 강연 도 중에 재밌는 퍼포먼스를 집어넣어 청중들을 집중하도록 하기도 하여서 나는 에듀와 마유의 동의를 얻어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장난감 마술봉을 포인터로 사용해 보기로 했다. 우리의 발표는 아주 성공적이진 못했지만 두 시간 동안 이어진 총 6조의 발표에 큰 웃음을 선사해 주었다. 흡사 로버트처럼 무뚝뚝하기로 소문났던, 그리고 인기가 완전 제로였던 나의 튜토리얼 교수 닐도 마술봉에 크게 웃음을 날려주었고 발표 분위기는 활기를 찾았다. 그래. 난 재밌는 게 좋아 생각했다.
육로 여행을 논문으로 쓰다
그렇게 찾은 주제가 바로 내가 즐겨하고 또 잘 해내는 육로 여행! 언젠가는 세상의 모든 육로로 국경들을 내 발로 통과해 보고 싶었던 또 다른 나의 꿈. 국경 통과 육로 여행을 통해 분쟁이 있는 국경 간의 분쟁을 완화시키고 경제적으로 이득이 오게 국경 여행과 국경무역을 장려하는 내용이면 어떨까. 사실 내용이 좀 뜬금없는 데다 아직 생소한 분야였기 때문에 레퍼런스를 찾는 곳도 힘들었고 게다가 논문 슈퍼바이저 교수를 고르는 것도 힘들었다. 아무도 이 주제를 연구해 본 교수가 없었기에. 그나마 가장 근접한 주제를 연구했던 교수가 네덜란드 출신 피토 교수. 그런데 이 교수는 이미 은퇴를 하고 명예교수 정도의 지위로 가끔 강의를 하러 오는 교수였기에 만약 내가 피터를 내 논문 슈퍼바이저로 선정을 하면 학교 측에서 피터에게 따로 비용을 지불해야 했기에 두세 번이나 안된다고 거절을 당했다. 하지만 내 논문 주제를 보고 피터는 흥미로워했고 우리 둘은 학교 측을 설득해 다행히 그가 내 논문을 봐주기로 되었다.
벨기에에서 온 나의 친구 사네는 내 논문 주제를 듣고서 고향인 벨기에에 다녀오면서 중고 서점에서 찾아냈다는 실크로드에 관련된 동화책을 선물로 주었다. 나의 황당무계하여 보이는 논문 주제를 응원해 주는 친구가 곁에 있어서 나는 내 논문 주제에 대해 더욱 확신을 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모든 학기가 끝이 나고 우리들은 마지막 에세이 제출 후 술집에 모여 작별 파티를 했다. 정말 재밌었던 시간들.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자부할 만한 시간들은 모두 함께 해 준 친구들 덕분이 아니었을까. 이제 5개월 간의 논문 작성만이 남았다.
5개월 간, 가장 친하게 지내며 서로 의지했던 벨기에 친구 사네. 우리는 어느 순간 낮밤이 바뀌어 학교에서 밤을 새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낮 1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 학교 도서관과 카페를 전전하며 논문을 쓰던 게, 점점 저녁 일곱 시나 돼야 학교로 나가 다음날 아침 6시까지 논문을 쓰게 되었다. 역시 낮밤이 바뀌면 몸이 힘들어지는 데다 사회성마저 떨어지는 느낌에 다시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학교 도서관을 오갔다.
아직도 학교에는 많은 친구들이 남아 함께 논문에 매진했다. 하지만 나의 절친 에듀는 맨체스터로 자리를 옮겨 일자리를 찾으며 논문을 썼기에 자주 볼 수도 없고 괜히 서운해져 사이가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이상하게 서로 질투가 많아지고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괜히 심술이나 간혹 싸우는 일까지 생겨서 나중에는 꼴 보기도 싫어질 정도로. 애증이란 바로 이런 거구나 했다. 이 점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큰 슬픔으로 자리 잡아 있다.
나는 그나마 레퍼런스가 많았던 인도-중국 국경 간의 평화여행을 주제로 골랐다. 이 국경은 현재 분쟁 조짐이 보인다고 뉴스에 뜨고 있는 바로 그 국경이다. 그리고 인도 파키스탄 국경도 포함했다. 내가 인도 중국 지역을 주제 속에 포함시킨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이 지역의 자연 풍광은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큰 대지의 국경이 군대들로 채워져 서로 전쟁을 할 준비만 하고 있다는 점이 무척 가슴이 아팠고 인도 파키스탄 국경은 국경에 가로막혀 많은 이산가족이 생겨나 여행을 통해서라도 흩어진 가족이 서로 만남을 갖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에서였다. 그리고 좋은 예시로 현재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는 인도 네팔 국경에 대해서도 썼다. 논문을 하루라도 손 놓고 쓰지 않으면 이상하게 머리 속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그동안 생각하고 조사했던 머리 속의 아이디어들은 다 어디로 도망가 버린 건지, 이래서 무언가를 쓰는 일은 하루라도 손을 놓으면 안 되는 거구나 했다.
대학은 축제 기간이 시작되었다. 논문 때문에 하루도 쉴 수 없었던 우리 동기들에게는 정말 힘든 시간이었다. 3-4일간 계속된 축제의 소음 때문에 도서관에서 논문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해져서 하루는 우리도 축제에 참여해 보았다. 그 당시 내 주변에 있던 친구들은 많이 없었기 때문에 나와 벨기에 친구 사네는 둘이 손 잡고 축제가 벌어지는 곳이 훤히 보이는 층계식 잔디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나마 사네가 돗자리를 준비해 와서 어느 정도 우리도 축제에 참여할 자격이라도 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들 삼삼오오 모여서 준비해 온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사실 나는 유럽 대학의 축제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맥주나 BBQ 거리를 사 와서 먹고 마시며 놀며 공연도 보고 행사에 참여도 하고 그런 식이었다. 만약 음식물이나 음료를 준비해 오지 않았다면 학교 내 매점이나 바에서 사 오면 되는데 가격이 조금 비싸서 그랬었나 우리는 그냥 멍하니 잔디밭 위에 펼친 돗자리에 멍하니 앉아서 구경만 했다. 다행히 그때 사네가 속한 사이클 서클에서 나온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맥주와 BBQ를 즐기고 있어 그 자리에 참여하여 어느 정도 신나게 놀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배가 고팠다. 차마 그들의 BBQ까지 얻어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축제는 건전하게 저녁 5시경에 끝났고 학생들도 거나하게 취해서 다들 집으로 혹은 바로 발길을 돌렸다. 남은 사람은 나와 사네, 그리고 친하게 지냈던 영국 대학생 팀과 크리스. 사이클 서클에서 굽다 남은 햄버거 패티를 남겨두고 가서 이걸로 햄버거를 만들어 먹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을 때, 갑자기 팀이 잔디 계단 아래로 내려가더니 사람들이 버리고 간 BBQ 석쇠와 숯, 일회용 접시 등등을 주워 왔다. 게다가 큰 햄버거 빵 한 봉지까지 주워 와서 우리는 석쇠에 숯을 올리고 패티를 구워 맛있는 햄버거를 만들어 먹고 학생들이 버리고 간 따지 않은 맥주병들도 모아 모아서 우리끼리의 소박한 파티를 즐길 수 있었다. 석쇠 위에서 타고 있는 숯불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논문 쓰기에 더 박차를 가하겠다는 지루한 생각에 잠긴 채.
'쓰기'에서 술 한잔 힘
일본인 친구 유타는 말했다. 와인이라고. 논문을 잘 쓰는 비법은 바로 와인. 와인을 마시며 논문을 쓰면 더 집중이 잘된다며 나한테만 특별히 그의 비법을 전수해 주었다. 값싼 와인을 사서 기숙사 방에 쟁겨 두고 집중이 안될 때면 한 입 한 입 마시면서 논문 쓰기에 집중을 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도서관에서 논문을 쓰는 중에는 간혹 맥주 생각도 낫다. 논문을 쓰다가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가는 걸까......
내 논문 슈퍼바이저 교수인 피터와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만나서 논문을 함께 검토했다. 일단 내가 쓴 부분을 피터에게 보내면 피터가 프린트를 해 살펴보고 볼펜으로 직접 코멘트를 남겨 주는 형식이었다. 이 피터 교수는 어찌나 꼼꼼한지 틀린 문법과 마침표 하나까지 다 고쳐 주는 바람에 사실 따로 proof reading이 따로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대신 일단 논문을 쓰고 우리 대학교 학부 졸업을 앞둔 영국 친구 팀에게 proof reading을 먼저 맡긴 후에 피터 교수에게 부분 부분 쓴 만큼 보냈다. 왜냐면 피터 교수가 자꾸 나의 꼼꼼하지 못한 부분을 지적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보통 proof reading은 돈을 받고 맡기거나 친한 사이에도 20만 원 정도를 주고 봐주곤 하는 건데 나의 친구 팀은 돈을 받지 않고 해 주었다. 그 친구도 얼마나 꼼꼼한지 이것저것 틀리거나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부분을 하나하나 지적해 주는 데다 코멘트는 어찌나 빨리 해주는지. 보잘것없는 내 엉망진창 논문은 피터와 팀이 없었으면 아마 완성되지도 못했을 터였다. 피터 교수와는 일주일에 한 번씩 보는 관계로 친해져서 나는 혼자 그를 '피터 팬'이라는 별명을 지어서 불렀다. 팀은 다음 해에 한국어를 배운다며 한국에 2-3개월을 있다 갔는데 내 논문을 봐준 대가로 쓸쓸한 그의 주말을 함께 놀아주는 것으로 보답했다.
꿈은 또 꿈을 부르는지
드디어 9월이 되어 논문을 제출했고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다.
더 이상 논문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12월 졸업식이 있을 때까진 아직 학생이라는 신분에 속해 있겠지만 그 후엔......
나는 나를 뭐라고 소개하고 있을까...... 꿈을 하나 이루었으니 이젠 또 다른 꿈을 찾아야만 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이며 논문을 쓰던 시기를 바로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내가 생각하는 '쓰기'는 바로 중독이다.
논문을 제출한 이후에도 자꾸 무언가를 공부하고 '쓰기'에 몰두해야 할 것만 같았다.
또 다른 꿈을 이루기 위해서.
꿈은 꿈을 부르는지 꿈 하나가 성취되니 자꾸 다른 꿈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런데 내가 논문에 쓴 대로 국경 간의 평화가 국경 통과 여행으로 가능해질 때가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