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틱 3국, 폴란드, 독일, 네덜란드 그리고...
라트비아, 라가
운이 좋게도 라가로 가는 버스에 혼자 앉아서 갔다. 운수 좋은 날이라고 생각됐다. 내 옆자리 말고도 빈자리가 몇 보였다. 에스토니아 국경에 도착하고 도장을 받은 후 짐 검사를 받았다. 그런데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봐서 그런지 내 가방을 이곳저곳 다 뒤져 배낭에 보란 듯이, 아무 생각 없이 여기저기 쑤셔 둔, 남은 러시아 루블로 산 담배 4개를 다 찾아냈다. 에스토니아 입국 시 허가된 담배는 달랑 한 갑. 한 갑 밖에 반입이 안되니 원하는 담배 한 갑을 고르고 나머지는 두고 가라고 했다. 몇 차례 신경전이 오가고, 그래도 그들은 내가 어떤 담배를 고를까 망설일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고민 끝에 검은색 담배 한 갑을 골라 내니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한다. 그 모습이 귀여워 헤어질 땐 악수까지 하게 되었다. 다시 버스에 오르니 내 자리에 어떤 남자가 앉아 있어 자리를 비켜 달라고 하니 내 자리 옆자리로 바로 앉아버려 라가로 가는 내내 그 덩치 큰 남자에 불만을 품고 라가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속으로 계속 투덜 투덜댔다. 버스가 흔들려 잠깐 몸이 부딪치기라도 하면 괜히 얼굴이 찌푸려졌다. 중간에 버스가 한 번 섰는데 화장실이 없어 다들 길거리에서 오줌을 누었는데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어 버스에 화장실이 있지 않냐 했더니 다들 없다며 어서 구석에 가서 일을 보라고 했다. 버스에서 화장실을 본 것 같아 버스가 다시 출발하자마자 버스 안에 있는 화장실로 바로 달려갔다. 길거리에서 오줌을 눈 승객들도 버스 안에 화장실이 있는지 몰랐던 듯했다. 속으로 많이 미워했지만 버스가 라가에 도착하자 내 옆자리 남자에게 괜히 미안해져 잘 가라고 인사를 하니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줬다. 라가의 거리는 러시아의 거리와 달리 아담하고 예뻤다. 골목골목에 작고 암담한 상점들이 즐비했고 이제 영국에 점점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들게 해 줬다. 배낭을 멘 체 길거리 카페의 커피 값을 조사해 보니 러시아에 비해 턱 없이 싼 물가에 배가 많이 고파졌다. 어서 호스텔에 체크인을 하고 밥을 먹으러 가고 싶어 무언가 먹을 궁리를 시작했다. 아침에 먹을 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커피 한 잔에 1000원가량에 빵 가격도 아주 싼 카페가 보여 호스텔 체크인을 미루고 우선 들어가서 토마토 수프를 시키고 빵을 골랐다. 러시아에서는 맛 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빵들에 눈이 돌아갈 것만 같았다.
사실 쌀이 먹고 싶었지만 아직까지 쌀밥을 파는 곳이 잘 보이지 않았다. 쌀밥은 언제 먹을 수 있을까, 내 위장이 쌀을 원하는 걸 느꼈지만 어쩔 수 없이 가난한 배낭자의 자세로 빵을 씹었다. 그래도 치즈까지 들어간 크로와상은 정말 달콤했고 수프는 밤 버스의 피로를 조금 풀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달콤한 생크림 타르뜨로 식사를 끝내고 근처 호스텔로 향했다. 라가의 호스텔은 지금껏 다닌 호스텔 중에 최악이었다. 방안에서 아침 9시가 넘은 시간에도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 2명의 서양 남자들이 보였다. 그리고 다른 침대들은 텅텅 비어 있었다. 방은 습했고 이불은 벼룩이 있어 보이고 안 좋은 냄새가 낫다. 게다가 방안의 공동 화장실은 이용하기가 너무 불편했다. 그래도 아직 2명의 남자가 잠에 빠져 있기에 얼른 짐을 정리하고 화장실로 가서 씻었다. 원래 계획은 방에서 한 숨 자고 나오는 것이었지만 아무래도 방에서 쉰다기보다는 갇혀 있는 답답함이 더 느껴져서 작은 크로스 백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어쨌든 오늘 하룻밤만 자면 되니까 참자 싶었다.
아직 아침나절의 거리는 고요했다. 영국으로 향할수록 점점 가을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9월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라가를 포함한 발틱 3국을 지나치면서 동양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라가의 거리가 더 쓸쓸하게 느껴졌을까. 거리를 거리며 동양인의 모습을 끊임없이 찾아 두리번거리며 자신감과 동질감을 되찾고 싶었으나 그 도시에 내가 유일한 동양인인 것 같아 외로웠다. 라가의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전쟁 박물관으로 향했다. 앞으로 영국에서 공부하게 될 평화학과 관련이 있기도 했고 사실 나는 이번 육로 여행을 계획하면서 방문하는 각 나라에 있는 전쟁 혹은 평화 박물관을 가 보리라 결심했었는데 비용과 시간으로 인해 그 원대한 목표가 내 뜻대로 되질 않았다. 라트비아를 식민 목적으로 독일과 함께 라트비아를 침공한 러시아의 잔인학 학살을 보여주는 박물관으로 러시아 주변국들엔 러시아 침공을 기록한 박물관들이 많이 보였다. 사실 나는 전공이 평화학이지만 전쟁 관련 박물관들의 잔혹한 기록을 보는 것이 싫었다. 아니 여전히 싫다. 평화학을 공부했던 나의 전 세계 각지에서 온 동기들도 그건 매 한 가지였다. 평화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전쟁과의 관련을 빼놓을 수 없지만 우리는 그 잔혹한 현실을 보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던 것 같다.
오후의 라트비아는 조금 활기를 되찾았다. 거리의 풍경은 칼라 플하 고아 기자기한 옛 건물들이 즐비해 꼭 동화 속 나라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그냥 아무런 계획도 없이 거리를 쏘다니기로 했다. 지도를 보는 것도 지쳤고 만약 호스텔로 가는 길을 못 찾으면 그냥 물어물어 가보라 결심하고 마냥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내일 저녁에는 폴란 바르샤바로 가는 버스에 올라야 했기에 몸속에 쌓인 피로를 풀고 싶었지만 그 암울한 호스텔로 일찍 들어가기엔 뭔가 자존심이 상했다.
오후 4시경 카페테리아에서 식사를 한 후 카페에 들러 노트북을 켜 보니 앞으로 공부할 영국대학원에서 이것저것 수업 정보와 함께 메일이 와 있어서 아무래도 저녁시간은 메일을 차근차근 읽고 수강신청 준비도 해야 할 듯했다. 원래 9월 16일 시작이넜던 학기가 다행히 9월 26일로 미뤄져서 조금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무엇보다 영국에서 머물 방을 알아봐야 하고 방을 구하기 전에 묵을만한 호텔 또한 알아봐야 해서 마음이 점점 급해지기 시작했다.
다음날, 폴란드 바르샤바 저녁 버스에 오르기 전까지 아이쇼핑을 하며 오전 내내 시내를 돌다가 점심식사 후에는 카페로 들어가 앞으로 준비해야 할 것에 대해 조사했다. 버스는 저녁 7시경. 6시경에 미리 버스정류장에 가서 승차홈을 확인한 후 정류장에 있는 빵집으로 가서 저녁으로 먹을 빵을 몇 개 산 후 시간이 남아 빵을 먹고 있는데 노숙자 차림의 할아버지가 내 빵을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근처 테이블에서 손님이 나가면 혹시 넘기고 간 빵이 있는지 케이블을 뒤지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워 빵 서너 개와 사과까지 넣은 비닐 봉지를 일부러 놓고 나오니 할아버지가 잽싸게 봉투를 열어 빵을 먹으려 하는 모습에 빵을 놓고 오길 잘했다 싶었다. 덕분에 저녁 버스 안에서 내내 굶을 테지만 나야 중간에 들르는 휴게소에 들러서 사먹거아 아니면 내일 아침 식사를 하면 된다 생각했다. 그리고 바르샤바행 버스에 올랐다.
폴란드, 바르샤바
리투아니아를 거쳐 바르샤바에 도착하자마자 내 위장은 쌀을 달라고 요동치고 있었다. 감자 따윈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며 시위라도 하는 듯했고 아침 일찍 호스텔에 들러 체크인을 마친 후 샤워를 한 후 식당을 찾아 나섰다. 마침 보이는 베트남 식당. 메뉴를 보니 5000원대 볶음밥이 보여 야외 자리에 앉아 돼지고기 볶음밥과 일본 녹차를 주문했다. 베트남인이 직접 운영하는 식당이어서 오랜만에 보는 동양 사람들이 참 반가웠다. 이번 육로 여행 중 최초로 맛 본 매콤한 맛의 고기와 밥. 역시 아시아의 밥은 따뜻한 구석이 있다.
그리고 바르샤바 역시 따뜻했다. 친절한 사람들. 햇볕이 따뜻한 바르샤바 길을 거닐 때면 마주 오던 바르샤바 사람들이 먼저 Hi? 하며 인사를 건네면서 지나치곤 했지. 가슴이 따뜻해지는 도시와 사람들. 아직도 참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바르샤바에서 베를린까지는 기차를 이용했다.
가격이 버스 가격만큼 저렴하여 낮 기차로 베를린에 도착. 다만 6명이 어색하게 한 캐빈에 앉아서 가는 형식의 기차가 조금 낯설었다. 게다가 여권에 도장을 찍지 않고 그냥 역누원이 와서 확인만 하고 가서 이제 진정 유럽에 왔음을 실감했다.
독일의 베를린과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베를린과 암스테르 담에서 당황스러웠던 점은 바로 키. 키가 어찌나 크던지 내가 꼭 앉아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 그들. 베를린에서부터는 길거리에 있던 상점에서 파는 볶음면으로 아주 호강을 했던 기억이 난다.
호스텔 근처 베를린의 초면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 함께 첨가해 먹을 수 있던 칠리소스. 양도 너무나 많아 한 번에 다 먹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음부터는 포장으로 주문을 하고 일단 반 정도 앉아서 먹다가 반은 싸들고 나와 호스텔에서 출출할 때 먹었던 기억. 암스테르담에서는 볶음면의 양이 적고 가격도 더 비싼 데다 먹고 나서도 아쉬움을 주는 초면이었던 것 같다.
베를린 장벽은 생각보다 관리가 제대로 안되어 있는 데다 사람도 많이 없어서 조금 실망을 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고호 미술관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고 기념품점에서 파는 고호의 침대 오르골을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은 사질 않고 온 게 아직도 너무 후회스럽기만 하다. 암스테르담에서 길을 잃고 무심코 들어간 홍등 거리에 겁을 먹었고, 그리고 저녁거리에 풍기기 시작한 마리화나의 냄새가 참 신기했던 기억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리고 드디어 영국, 런던
암스테르담에서 밤 버스+페리를 타고 도달한 영국 국경. 학생자까지 받아왔건만 이민국 카운터에서 일일이 트집 잡던 사무관과 30분가량 실랑이를 하며, 그 여자가 원하는 입학 증명 서류를 버스 트렁크에 실린 배낭에서 꺼내 바치고 하며 겨루 입국 수속을 마칠 수 있었다. 나 말고도 시간이 걸리는 외국인들이 많아 나는 우리 버스 운전사 분과 승객이었던 영국 시민권자 이라크 아저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그 지루한 시간을 견뎠다.
런던은 그야말로 찬란했다. 런던 버스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호스텔을 찾기 위해 근처 스타벅스에 들어갔는데 노트북 콘센트를 꼽으려고 이리저리 둘러보았더니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영국 청년이 친절히 내 콘센트를 자리 자리 옆에다 꽂아 주고 미소를 지었다. 친절하고 신사답다. 어학연수 시절의 영국은 정말 차가웠었는데 대학원생의 신분으로 와서 그런지 무언가 다른 느낌이었다. 게다가 벌써 7년이 지난 시점이라 그때의 국민의식이 많이 변했다는 게 몸소 느껴졌다. 한국 민박 도미토리에 숙소를 정하고 가봤더니 게다가 방이 업그레이드되어 싱글룸을 쓰는 호사까지 누렸다.
토요일의 런던! 은 정말 화려했다. 길을 잃어 술집 거리에서 지도를 보고 있으니 화려하게 차려입은 할머니가 "오! 길을 잃었나 보네. 여기 혹시 이 애 도와줄 사람 없어?" 하며 웃으며 크게 소리쳤다. 나는 쑥스러움에 길을 찾았다고 괜찮다고 거짓말을 하고 황급히 그 자리를 피했다. 그런데 그 거리는 왜 그리 잘생긴 영국 남자들이 맥주잔을 들고 서서 축배를 드는지, 다들 와이셔츠 팔을 걷어 부치고 부딪치는 맥주 파인트 컵이 정말이지 빛이 났다. 나도 저 사이에 껴서 선 채로 맥주잔을 부딪히고 싶다 생각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될 날이 오겠지. 런던의 환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시작할 대학원 공부에 대한 걱정은 주말이 지난 후에 시작해도 늦지 않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