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집의 식사 초대
베트남 중부의 꽝나이 성에서 일하던 시절, 함께 일하던 베트남 통역의 집에 처음으로 저녁 초대를 받았다. 그때는 베트남의 대명절인 Tet 즉 설날 연휴가 시작될 무렵이었고 나는 그 당시 그 베트남 통역과도 조금 서먹서먹했던 사이였다. 초대를 응하기도 혹은 거절하기도 참 애매했던 그런 사이.
새해맞이 초대
택시를 타고 갔던 그 집은 베트남에서도 시골이랄 수 있던 꽝나이시에서 택시로 30분 더 가야 하는 그야말로 논밭이 펼쳐져 있던 시골 중의 시골이었다. 베트남의 여느 시골처럼 그 집도 근처에 친척들이 줄을 이어 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더욱 그 초대를 응하기가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택시를 타고 그 시골로 가던 길에 과일가게가 보여 잠시 택시를 세워 과일을 샀다. 과일을 사들고 다시 택시를 타 길을 찾는데 너무 시골의 구석에 있던 그 집을 찾기도 힘들어서 택시 운전기사와 베트남 통역 직원을 전화로 연결시켜도 길을 찾지 못해 지나가던 동네 주민을 붙잡고 물어 물어 겨우 집 앞에 다 달았다. 그래도 그 시골에서는 꽤 잘 사는 집인 듯 대문이 컸고 대문에서 집까지 큰 마당을 몇 분을 걸어 집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아직은 어두워지기 전의 저녁나절. 통역의 조카아이들이 거실과 마당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인 거실 바닥에 쭉 을러놓은 베트남 음식들. 처음에는 바닥에서 음식을 먹는 줄 알고 바닥 구석 쟁이에 홀로 앉아 있었다. 직원은 부엌에서 과닐을 손질하느라 바빴고 거실에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베트남 아저씨들 사이에 끼어 앉기도 뻘쭘했고. 사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지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니 그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던 직원의 큰아버지가 나를 보고 소리를 질러댔다. 이유는 바로 내가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인들을 학살한 나라의 국민을 왜 초대했냐며 소리를 질러된 거라고 들어서 미안하기도 하면서 겁도 먹고 그런 실정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 홀로 음식 앞 바닥에 앉아 고개를 돌려가며 집구경을 하고 있자니 직원의 동생 남편이 테이블을 거실로 옮겨와 테이블 보를 깔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바닥에 늘어놓은 음식 중 반을 테이블로 옮기고 음식의 반은 바닥에 구대로 둔 채로. 거실에서 담소를 나누던 베트남 남자들이 하나둘씩 음식을 차려 놓은 테이블로 오더니 나를 일으켜 세워 테이블 자리로 안내했다. 집안의 여자들은 테이블에 앉지 못하고 대신 바닥으로 자리했다. 꼭 옛날 우리나라처럼. 그래도 남자들이 먼저 움식을 먹고 남은 음식을 여자들이 해치우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여자였던 나의 베트남 통역도 다른 여자들과 함께 바닥에 앉아 나만 뻘쭘하니 남자들이 둘러앉은 테이블로 자리했다. 어색한 분위기도 잠시, 몇 잔의 보드카가 다행히 서먹한 기운을 가라 앉혀 주었고 나를 경계하던 큰아버지의 표정에는 어느덧 미안함이 서려 있었다. 바닥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10여 명의 여자들 쪽의 고개는 항상 우리를 향해 있었다. 술 한잔 마시지 않고 그들은 음식을 먹으면서 우리 쪽 테이블이 어떤 얘기를 하는지 왜 그렇게 크게 웃음소리가 나는지 궁금해하는 듯했다. 그 여자들은 우리 베트남 통역의 엄마와 여동생 그리고 고모, 큰엄마 등 모두 친인척들이었다. 우리 쪽 테이블에서 베트남 식으로 못 하이 바! 하면서 큰 소리로 건배를 하면 부러운 듯한 표정으로 음료만을 마셔 댔고 나는 그 모습이 못내 안쓰러워 이제 나도 바닥에서 여자들과 밥을 먹고 싶다 하고 맥주컵을 들고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
먼저 가장 수다스러웠던 우리 통역의 고모 앞에 앉아서 보드카를 권하니 바로 보드카 잔을 찾아들고 와서 주변 여자들에게 모두 보드카 잔을 건넸다. 그런데 이 분들은 술을 많이 마셔 본 적이 없는지, 아니면 떠들썩하게 마셔 본 일이 없었는지 베트남 식으로 건배하는 법도 몰라 내가 건배하는 법을 몇 번 가르쳐 준 후에 큰소리로 다 함께 못 하니 바! 를 외치고 술을 조금씩 마셨다. 괜히 뿌듯한 이 기분은 뭔지. 그리고 처음 마주한 외국인이 함께 술도 마셔주고 손짓 발짓 얘기도 함께 나누고 하는 것에 더 즐거웠던 듯했다. 사실 나도 이렇게 현지인 가정에 초대받아 집도 구경하고 그들의 문화도 체험할 수 있는 점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현지에 살고 있어도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라 모든 것이 마냥 신기하고 즐겁고 그런 때였던 것 같다. 나는 여자 쪽에 앉았다가 다시 남자 쪽 테이블 쪽으로 가서 놀다가 다시 조카아이들과 마당에 나가서 작은 연못 속의 물고기 구경을 했다가 했다. 통역 없이는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재미가 있었던 것도 같다. 다시 어린아이라도 된 듯 서로 손짓 발짓으로 대화를 이어갔는데 이상하게 대화가 잘도 통했고 우스꽝스러운 몸짓 때문인지 그럴 때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가 그리 재미있었던지. 그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나서 옆 옆집에 있던 작은 아버지 집구경을 했다. 새로운 꽃을 심었다며 작은 마당도 구경시켜 주고서는 또 두세채 건너 있던 큰아버지 댁에서 녹차로 입가심을 하고 그런 순서로 쭉 이어지던 초대였다. 큰아버지와 작은 녹차 잔을 마주하고서는 나는 통역을 앞세워서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 양민들을 학살한 한국군인에 대해 사과했다. 큰아버지는 그건 나의 잘못이 아닌 국가 간의 비극이었다며 되려 미안하다고 해 주셨다. 그리고 그날 밤의 달은 정말이지 밝았다. 곧 설날이 다가왔던 밤이었으므로. 아직도 그날의 큰아버지 댁의 마당과 마당 한편에 꾸며 놓은 돌로 만든 테이블과 의자들이 떠오른다. 녹차였지만 이상하게 취하는 느낌이 들었던 그런 밤에 기억들이.
아들 직장동료 모임에 끼어
그동안 나는 통역의 집과 잦은 소통을 했다. 자주 찾아가지는 못했지만 김치를 사다 통역 엄마에게 전해 주기도 했고 맛있는 과일이 있으면 넉넉히 사서 통역에게 들려주곤 했다. 통역의 가족들도 가끔 나에게 선물을 보내 줬다. 내가 술을 좋아한다고 생각한 통역의 아버지는 베트남의 전통주를 그리고 통역의 엄마는 직접 담근 피클 등을 선물해 주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통역은 나에게 소개를 시켜준 적이 있는 남자 친구와 결혼을 했다. 그 남자 친구와는 주말마다 밥도 먹고 같이 놀러도 다녔기 때문에 나하고도 꽤 친한 사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통역이 자기 시댁에 와보겠냐며, 마친 남편 친구들이 시댁에서 점심 모임을 하기로 했다며 덩달아 나까지 초대했다. 마침 통역이 어떻게 살고 있나 구경도 할 겸 길을 나섰다. 꽝나이시에 있기는 하나 택시로 20분 정도 달려야 하는 시골에 자리한 통역의 시댁. 통역도 하나뿐인 화장실과 함께 살고 있는 시부모님 그리고 도련님네 가족 등 좁은 집에 사람이 너무 많아 늘 불편하다고 했었다. 그런 통역이 무척 가엽게 느껴지곤 했다. 통역은 임신을 한 상태였기에 더욱 불편하다고 했다. 그래서 낮에 사무실 겸 집으로 사용했던 우리 집에서 일하는 편이 훨씬 더 편하고 좋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그 날은 통역의 남편이 함께 일하는 직장동료를 초대한 날이었다. 그냥 통역의 시아버지가 바다에 나가 게와 해산물 등을 많이 잡아온 김에 겸사겸사 아들 동료들을 초대한 모양이었다. 내가 해산물 중 특히 게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통역과 그의 남편이 마침, 내 생각이 낫다고 했다. 그 마음 씀씀이가 참 고마웠다. 통역의 남편은 한국 기업인 두산비나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그의 동료들도 한국인인 나를 전혀 낯설게 보지 않았다. 통역의 시부모님과 도련님네 가족도 나를 정말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시댁 식구들이 통역에게 잘해주기를 바라며 조그마한 선물도 들고가 전했다. 우리들은 거실 바닥에 늘어놓은 음식을 집어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낮술도 조금씩 해가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곳에서 새 친구도 사귀어서 가끔 꽝나이 성을 지나칠 일이 있으면 연락도 하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 아주 친한 친구 간은 아니라서 막 시끌벅적하고 그런 자리는 아니었지만 젊은 층이 많이 모여서 그런지 마음이 더 편하고 즐거운 시간이 되었던 것도 같다.
베트남 아기 돌잔치 초대
그리고 나의 통역이 드디어 아기 엄마가 되었다. 나는 임기를 마치고 꽝나이 성을 떠나야 했고 떠나기 전에 선물 등을 주고 아기를 보러 한 번 집에 들렀다. 아주 작은 딸아이를 안고 있던 통역의 모습이 많이 안쓰러웠다. 다시 찾게 된 베트남. 그 김에 나는 나의 통역 딸 디에우의 돌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꽝나이시에 들르게 되었다. 훌쩍 큰 딸아이를 안고 있던 통역과 그의 남편. 그 둘은 이미 나에게 있어 정말 고마운 친구 혹은 가족 같은 사이가 되어 있어 반년 만의 만남이 참 감격스러웠다. 돌잔치는 낮 1시경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나는 기차 시간 때문에 12시에는 그 집을 나서야만 했지만 그래도 통역의 첫딸 돌잔치에는 꼭 참석하고 싶어서 들렀던 거였다. 돌잔치에 앞서 애기를 목욕시키고 옷을 입히고 하는 과정에서 애기는 짜증이 났는지 무척이나 예민한 상태였다. 게다가 내가 안경을 껴서 그런 건지 낯설어서 그런 건지 나만 보면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그냥 멀찍이서 애기를 구경했다.
우는 애를 달래기 위해 통역의 남편은 애기를 안아 들고 집안을 이리저리 돌았다. 나도 덩달아 그들을 따라 잔치 준비를 구경했다. 부엌에서는 음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요리는 통역의 친척들이 하고 있었고 주로 고기반찬이어서 고기를 먹지 못하는 나를 위해 늘 그랬듯 통역의 엄마는 특별히 해산물 요리 한 접시를 따로 준비했다고 했다. 나는 통역의 딸 디에우 선물로 한국에서부터 애기 옷과 장난감 등을 준비해 갔다.
음식을 놓을 공간이 주방에 없었는지 침대 위에 늘어놓은 음식과 접시들의 모습이 신기했다. 음식을 따로 주문하지 않고 집안에서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 만드는 모습도 참 정겨웠다. 베트남은 아직도 우리의 옛 모습이 많이 보여 무언가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하나하나 꺼내 볼 수 있게 해 주는 마력이 있는 것 같다. 나는 기차 시간에 쫓겨 돌잔치에는 참석할 수 없었다. 아쉬웠지만 선물을 전해주고 애기 얼굴과 통역과 남편 그리고 통역의 가족들에 인사를 하는 것을 끝으로 그 집을 떠났다.
통역의 애기는 돌상에서 연필을 집었다고 했다. 그것도 연필 꼭대기에 달린 키티의 머리를 톡 치면 불이 켜지는 귀여운 연필을. 나에게 선물로 준다며 후에 친구를 통해 어찌어찌하여 전달받게 되었던 그 연필. 통역은 딸이 연필을 잡아서 무척 좋아했다. 나도 통역 딸 디에우가 연필을 잡고 열심히 공부하기를 빌었다.
그리고 조촐한 나의 초대상
통역과는 통역 딸 디에우의 돌잔치를 끝으로 다신 만날 수가 없었다. 나는 현재도 베트남에 머물고 있지만 통역이 살고 있는 꽝나이 성으로 부터는 많이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이다. 통역과 남편도 먹고 사느라 바빠 내가 살고 있는 지역으로 놀러 나오기는 힘이 든다. 그들은 신혼여행으로 꽝나이 성에서 차로 3시간 걸리는 다낭에서 하룻밤을 자본 게 그들의 먼 여행의 다 였을 정도로 소박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나는 이번에 사진첩을 정리하면서 예전에 내가 통역과 남편을 포함한 다른 베트남 친구들을 초대했던 상차림 사진을 발견했다. 없는 재료로 김밥을 싸고 조개탕을 만들고 김치전을 부치고 허둥지둥 서툴게 차렸던 초댓상. 누군가가 직접 차린 밥상에 초대를 받고 또 초대를 하는 그런 일은 사람의 마음을 참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정말 특별한 밥상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