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도 뭣도 아닌 단순 기록
아직도 육로로 유럽까지 여행하는 친구들이 존재할까. 지금처럼 값싼 비행기 정보가 난무(?)하는 시대에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굳이 육로로 고생해가며 여행하는 배낭여행자가 았을까 문득 의문이다. 때는 2013년 초. 영국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이제 비자도 끝나가는 시점에 나는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 가는 길을 육로로 선택했다. 어쩌면 지금도 장시간 비행은 생각만 해도 진땀이 나 장시간 비행기로는 출장도 피하고 있는 비행공포증 환자이지만 그 시기에는 정말 단 한 시간 아니 몇 분조차 비행기를 탈 수 없는 겁쟁이 신세였다. 석사논문을 제출하고 10월부터 1월까지 런던 트윈룸 실에 머물며 초밥집에서 삼 개월 정도 알바를 한 돈과 아껴둔 비행기 삯을 제외하곤 정말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신세로 나는 다시 정말이지 어처구니없이 무모한 육로 여행을 시작했다. 벌써 8년도 더 지난 일인 데다 2014년 초에 노트북이 망가져 사진도 다 날아가고 친구에게 이메일로 보냈던 사진과 페이스북에 포스팅한 사진 십여 잔만 겨우 건진, 게다가 여정도 가물가물하고 머리를 쥐어짜 내야만 하는 빛바랜 추억이 되었지만 그 몇 장의 사진과 페이스북에 남긴 기록을 모아 더 늦기 전에 이곳에 끄적여 보고 싶어 졌다.
나는 한국에서 영국까지 석사 공부를 위해 영국에 올 때에도 육로로 왔다. 그때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왔었는데 모스크바의 박물관에서 가장 싼 3단짜리 마트료시카와 역시 모스크바 호스텔에서 론니플래닛 시베리아 횡단과 맞교환한 론니플래닛 중앙아시아 편은 늘 내 대학 기숙사 방 책장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때에는 중앙아시아를 통과하리라 하면서. 영국에서 석사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석사 논문까지 통과되었던 9월 말. 사실 우리들은 모두 고국으로 돌아갈 자유를 얻은 셈이었다. 그래도 우리 중 몇몇은 영국에 계속 남아 보기로 했다. 첫 번째 이유로는 영국 혹은 유럽 등지에서 일자리를 구해보겠다는 신념으로. 그리고 두 번째는 12월 초에 있을 졸업식 참석을 위해서였다. 결론적으로 나는 그 두 가지 이유에서 좋은 결과를 얻진 못했다. 런던에서 3달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군분투 해보았지만 영국인들도 취업난을 겪던 시기였고 나는 졸업식에 드는 비용으로 졸업식 대신 아일랜드 여행을 떠나 동기애들의 야유를 받았다. 사실 내가 영국을 떠나지 않고 더 머문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지만 나는 이 이유를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했다. 비행공포증으로 과연 비행기를 탈것인지 아니면 다시 육로로 한국까지 되돌아 가야 할 것인지 심히 고민스러웠던 것이 내가 런던에 더 머문 마지막 이유였다는 것을. 차마, 난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나의 심정을 이해하는 친구가 과연 있을는지, 그리고 이해한다고 말해도 영국에서 한국까지 육로로 간다는 걸 내 주변의 그 누구가 이해할 수 있을까 해서. 하긴 한국에서 영국까지도 25일 만에 육로를 통해서 왔다고 말했을 때는 다들 신기해했지만 다시 육로로 되돌아 간다면 멋지다 혹은 용감하다고 생각해 줄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일종의 자격지심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이 육로 여행은 나에게 있어 평생 잊지 못할 추억거리가 되어 주고 있다. 영국에서 한국까지 육로로 가려면 최소 1달 반의 시간이 걸릴 것이고 따라서 가능하면 들고 가는 짐을 줄여야만 했다. 짐은 중간 크기의 배낭 하나와 2011년도 베트남에서 샀던 흥 몽족스러운 숄더백에 최대한 싸 넣었는데 배낭에 겉옷까지 쑤셔 넣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나는 런던 노팅힐 거리에서 산 세컨핸드 털조끼 위에 맨체스터 ZARA에서 샀던 내가 갖고 있던 단 하나의 겨울옷인 코트까지 껴입었다. 큰 맘먹고 산 5만 원짜리 영문 교재를 포함한 책들을 포기하니 다행히 그 작은 배낭에 짐을 다 구겨 넣을 수 있었고 드디어 나는 밤 버스를 타고 런던을 떠났다. 그때의 기분은 우선 불안했다. 나의 미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해서.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고민들은 터무니없게까지 느껴지기까지 한, 그냥 육로 여행이나 즐기고 즐길 것을 하는 생각이 든. 그냥 순간을 즐기면 될 것을 사실 아직까지도 나는 여전히 미래를 불안해하면서 일하며 여행하며 살고 있는 것 같다.
- 런던-브뤼셀-프랑크푸르트로 이동
런던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까지 가는 밤 버스에 올라 3시간여를 달리니 버스는 영국 도버항에서 배로 들어가 승객들을 배 위로 올려놓았다. 다행히 아이랜드를 갈 때처럼 배가 흔들리지 않았고 배에서 마주친 영국 남자애에게 생맥주를 한 잔 살 테니 함께 마실래 라는 제안까지 받아 조금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 제안은 물론 단칼에 거절했다). 배는 다시 프랑스 항구에 도착 그리고 다시 우리들을 태운 밤 버스는 독일을 향해 달렸다. 새벽에 브뤼셀에 도착했을 때 나도 다른 여행자들처럼 스머프 박물관도 가고 핫 초콜릿도 먹어보고 싶었지만 이번 여정은 최대한 돈을 아끼고 최단거리로 한국에 가야 한다는 일념에 그냥 브뤼셀의 15분 휴식에 만족해야 했다.
고풍스러운 건물이 즐비한 런던과는 달리 유리창에 높은 빌딩만 보이는 거리를 보며 꼭 안 가봐도 될 도시라며 혼자 위안을 삼았던 브뤼셀의 거리는 따뜻한 영국과는 달리 너무나도 차가웠다. 왠지 얄미운 느낌에 모두가 잠든 버스 안에서 몰래 창가에 발을 올려 사진을 찍었다. 왜 이런 짓을 했을까......(잘못했습니다).
- free 스파게티 파티를, 프랑크푸르트, 독일
몇 시간을 더 달려 도착한 프랑크푸르트 역의 칼바람은 역 건너편 호스텔 간판을 확인하는 내 옆에 선 인도네시아 여자애가 담뱃불을 붙이기 위해 켜대는 라이터 불을 계속해서 꺼트렸다. 그 바람에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드렸고 추운 독일 날씨에 대해 불평했다. 이 도시로 말하자면 어렸을 때 봤던 만화 하이디에서 하이디가 병약한 클라라를 위해 함께 따라갔다가 난생처음 본 복숭아 모양의 하얀 빵을 시골 동네 친구들에 나눠주기 위해 옷장에 쌓아 놓았다던 바로 그 도시. 하이디가 프랑크푸르트에서 겁을 잔뜩 먹었을 만큼 삭막한 곳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의외로 사람들은 매우 친절했다.
오전 일찍 도착한 호스텔의 직원의 따가운 눈초리가 걱정되었는데 다행히 그는 나를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저녁에는 공짜 스파게티 파티를 여니 꼭 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게다가 공짜 맥주까지 준다니 저녁값을 아낄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이 호텔은 프랑크푸르트에서도 가장 싼 5유로. 게다가 스파게티와 맥주가 공짜라니... 남는 게 있을까 싶었는데 사실 공짜 맥주에 이어 맥주가 더 많이 팔린다면 이득을 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안내받은 도미토리 룸에는 나 말고 3명이 더 있었는데 죄다 유럽 청년들이어서 조금 불편했다. 일단 내일 새벽 4시 반 버스를 타야 하니 일찍 일어나 씻을 생각으로 화장실 근처의 침대에 짐을 내려놓았다. 한 숨 자야겠다 싶었다. 그렇게 잠에 들어 깨어 보니 벌써 한낮이 되어 있었다. 샤워를 하고 도미토리에 있는 유럽 청년들 얼굴을 자세히 보니 그들은 여행객 치고는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뭐가 이들을 이리 피곤하게 만들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나는 일단 프랑크푸르트 시내를 대충 돌아보기 위해 그들과 짧은 눈인사만 하고 길을 나섰다.
뢰머광장 주변은 죄다 은행 빌딩 들이었고 날씨도 추워서 그런지 거리에 사람도 없고 그리 흥미롭진 않았다. 다만 런던보다는 싼 물가에 오랜만에 슈퍼에서 파는 진짜 담배를 샀다. 영국에서는 줄곧 말아 피는 담배를 사서 피웠는데 영국 담배보다 좀 더 싼 독일 담배의 유혹을 떨치지 못해 점심은 과자로 대충 때우고 그 대신에 5유로짜리 담배를 선택했다.
다행히 호스텔의 아직도 기억나는 가난한 여행자였던 나에게 조차 혹평을 받은 그 저녁 무료 스파게티 파티는 성황을 이루었다. 여행자들이 아무리 공짜라고 해서 근사한 여행지에서의 저녁 대신 스파게티를 먹으러 올까... 나도 가지 말까... 그래 일단 분위기나 보자 하고 들렀던 호스텔의 레스토랑은 다행히 많은 사람들로 붐벼 주었다. 혼자였는데 다행히 스파게티와 맥주를 받아 자리를 잡고 앉았더니 아까 도미토리 룸에서 보았던 3명의 청년이 내가 자리 잡은 식탁으로 와 반갑게 인사까지 해 주었다. 그들 중 두 명은 아일랜드에서 일자리를 찾아 독일에 2달째 머물고 있었고 한 명은 필리핀 애로 미국 이민자라고 했다. 이 필리핀 애는 누가 봐도 딱 게이로 나는 그의 수다스러움과 부드러운 영어 말투가 좋았고 그 애가 앞에 앉아 있으니 그냥 신이 절로 났다. 독일에서 페인트 칠을 한다는 두 명의 아일리쉬는 여전히 피곤에 쩐 얼굴이었지만 처음의 어색했던 만남과는 달리 연신 보조개까지 띄우며 미소를 지어줘서 그날 밤은 괜히 조금 더 신이 났던 것도 같다. 우리는 공짜 맥주로 건배를 하며 웃고 떠들고 하다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누군가 사준 두 번째 공짜 맥주에 다 같이 일어나 건배를 했던 장면은 아직도 큰 추억거리가 되어 주어 간혹 생각이 나곤 한다. 그날 밤 우리들은 무슨 얘기를 나누었을까. 기억은 못하지만 우리가 건배하고 웃고 했던 모습은 마치 사진에 담은 장면처럼 기억이 선명하다.
-프랑크푸르트- 체코 이동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다행히 새벽 4시에 깨어 대충 씻고는 짐을 들고 프랑크푸르트 역으로 나갔다. 사실 이 5유로짜리 프라하행 새벽 유로 버스를 예매할 때부터 나는 이른 새벽 시간에 홀로 독일 거리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했었다. 그런데 다행히 나처럼 싸구려 버스를 타러 오가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거리는 생각보다 더 안전한 느낌이었다. 다만 프라하행 버스 정류장을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이리저리 헤맸다. 그러다 어느 버스 정류장에 홀로 서있는 일본 남자를 보고 혹시 프라하를 가냐며 이 버스장은 아닌 것 같다고 하니 내 말을 무시하며 그냥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다. 나를 못 미더워하는 그를 지나쳐 다시 역 앞으로 달렸더니 드디어 프라하행 버스가 도착했다. 출발시간은 고작 5분만이 남아있어 그 일본 남자애를 구하러 갈 것이냐 말 것이냐 한 10초 정도 고민이 되긴 했다. 버스가 나를 버리고 떠나 버리면 나는 어찌 한국까지 육로로 갈 수 있을까. 하지만 곧 버스기사에 양해를 구해 마구 다시 달려서 저 멀리서 홀로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일본 남자를 구해 함께 버스로 되돌아 달려왔다. 퉁명하기만 했던 그 일본 남자를 모른척해 버릴까 하는 유혹도 있었다. 다행히 버스는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고 일본 남자는 버스 앞쪽에, 나는 버스 중간쯤에 홀로 자리를 잡아 프라하로 떠날 수 있었다.
-눈 오던 차가운 프라하, 체코
드디어 5시간 후 도착한 프라하. 나는 혹시 내가 구제해 준 그 일본 남자가 인사라도 하고 떠날 것을 기대하고 그를 쳐다봤지만 그는 냉혹하게 돌아섰다. 눈으로 꽝꽝 얼어붙은 거리에서 나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끙끙대면서 그야말로 기어가다시피 예약해 둔 호스텔까지 30분을 걸었다. 아니 기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역시 5유로 정도 했던 이 프라하 호스텔의 시설은 한마디로 대만족이었다. 1층에는 독일 맥주를 즐길 수 있는 거대한 바가 있어서 리뷰를 보면 시끄럽다는 불평도 많았지만 워낙 잠귀가 어두운 나는 그런 것 따윈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행히 1층 침대에 자리를 잡고 일단 피곤한 몸을 샤워로 풀고 나서 나는 거리로 나섰다.
단 하룻밤만 프라하에서 보낼 예정이어서 시간이 많지 않았다. 호스텔에서는 디포짓까지 요구했기에 나에게 남은 체코 돈은 그리 많지 않아 돈을 최대한 아껴 써야만 했다.
길에서 본 체코 전통 빵 뜨르들로도 사 먹지 못하고 나는 일단 프라하 성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오렌지 빛 지붕이 이쁘다던 프라하의 지붕은 눈이 쌓여 그냥 하얗게 빛났다. 나도 오렌지 색 지붕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눈이 원망스러웠다. 내 낡은 운동화는 나를 눈 위로 몇 번이나 넘어뜨리려 했고 살금살금 걸어가는 나를 도와줄까 말까 하는 눈빛으로 보는 프라하의 청년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야경이 아름답다는 프라하성에 좀 더 머물고 싶어서 근처 맥도널드에 들어가서 커피를 시키고 몸을 녹였다. 그나저나 오늘 하루 종일 제대로 먹은 것이 없다는 것이 문득 생각났다. 프라하는 런던이나 독일에 비해 많이 싼 편이지만 나 같은 가난한 육로 여행자에게는 그렇게 싼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드디어 해가 지고 야경이 펼쳐졌다. 맞다...... 눈까지 쌓인 야경은 이뻤다. 게다가 고요하고. 하지만 나는 다시 호스텔로 돌아갈 길을 걱정했다. 길이 정말이지 너무나 미끄러웠다.
그래도 프라하 성을 빠져나와 호스텔 근처로 되돌아가는 골목골목은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을 정도로 예뻤다. 추운 날씨에 눈까지 쌓였지만 히미한 가로등 불빛 때문이었을까, 무언가 따뜻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나도 레스토랑에 들어가 화이트 와인으로 끓인 굴요리를, 하얀 테이블보가 깔린 근사한 식당에서 먹고 싶었지만 슈퍼마켓이 잘되어 있는 프라하에서는 그냥 빵과 치즈 등을 사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냥 들어가기 아쉬워 식료품 봉지를 들고 거리를 쏘다니다 다시 도착한 호스텔의 바에서는 투숙객을 상대로 아주 싼값에 맥주를 제공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체코 돈은 거의 바닥이 나 있었고 내일 호스텔을 체크아웃하고 받을 디포짓만이 남아 있었다. 그 디포짓은 내일 헝가리행 기차를 타기 전까지 쓸 예정이었고 그렇다고 환전을 하자니 체코 돈이 남을 게 분명했다. 단위가 큰 파운드만 갖고 있던 나에겐 소비욕구를 그냥 참는 수밖에 없었다. 호스텔 도미토리에서 만난 한국 여자분이 함께 바에 나가 맥주를 마시자고 제안했지만 체코 돈이 없어서 마실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 아. 이렇게 체코 맥주가 나를 또 지나쳐 가나 싶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
그리고 체코 프라하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가는 다음 날. 이 날은 아침부터 조금 설레었다. 드디어 유럽에서 기차를 타 보는 날이기도 했기에. 영국에서 20분가량의 짧은 구간은 기차를 타보기도 했지만 너무 짧고 우리나라 기차와 크게 차이를 느끼지 못해서 그랬는지 유럽 기차 같은 느낌이 크게 나지 않았다. 조금 미리 예약한 덕분인지 운 좋게 버스 값과 비슷한 가격의 이 구간의 기차를 예약하고는 설레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프라하의 기차역에 드디어 도착했다. 기차 타기 15분 전인데도 도대체 기차가 도착한 건지 만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역무원에게 기차표를 내밀고 물어봤더니 역무원은 아주 험상 굳은 얼굴로 Wait!라고 소리치며 신경질 난 얼굴로 나를 쏘아봤다. 이게 그렇게 신경질을 부릴만한 질문인 건지 나는 그 역무원의 화난 얼굴을 무시해 버리고 기차를 기다렸다. 나중에 헝가리 버스터미널에서도 비슷한 일을 당했는데 알고 보니 공산권 공무원의 특성이라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을 뿐, 도리가 없는 것 같았다.
다행히 내가 탄 케빈은 텅 비어 있어 아주 편하게 부다페스트로 향했다. 헝가리는 또 어떤 분위기를 보여줄까, 들려줄까 하는 기대감은 플러스. 하지만 부다페스트는 애석하게도 나에게 그리 즐거운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