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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Dec 12. 2017

우리 엄마에게 바치는 글

엄마라는 단어는 나에게 우리 엄마일 뿐이었다.

 



아침마다 졸린 나를 깨우고, 사랑하는 우리 딸 하고 날 꼭 껴안아주고, 가끔 투덜거리거나 짜증내고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우리 엄마.


가난한 집에 셋째 딸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나온 뒤로는 계속 일해야 했던 우리 엄마.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우리 엄마는 동네 다른 엄마들처럼 뽀글머리가 잘 어울리는 그냥 엄마가 되었다.


가끔 나는 시장에서 몇 백 원 깎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우리 엄마가 부끄러웠고, 일한다고 비 오는 날에 학교로 마중 오지 못하는 우리 엄마가 미웠다. 짧은 머리에 목소리가 크다며 '너네 엄마 꼭 남자 같다'라고 말하는 짝꿍에게 아무런 대꾸도 못했고, '우리 딸은 정말 예쁘다'라고 남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말하는 우리 엄마가 창피하기도 했다.



우리 엄마는 그냥 우리 엄마였다. 사랑하지만 엄마는 가끔 말이 통하지 않았다. 때로 엄마도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지만 다른 생각을 했고, 지지하는 정당은 극과 극이었다. 사랑으로도 건널 수 없는 강은 존재하는 법이니까. 어쩔 수 없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스무 살 이후 나는 대학교에 간다고 고향을 떠났고 우리 엄마는 그런 나를 보내는 버스 터미널에서 눈물을 보였다. 우리 엄마는 좀처럼 잘 울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그날은 펑펑 울었다.


나는 미안하지만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그 작은 지방 소도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데 내가 왜?

방학마다 볼 텐데 엄마는 왜 울까?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 나는 우리 엄마가 왜 울었는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10분을 넘기지 못했다.

버스는 빠르게 지방 소도시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내 머릿속은 새로운 곳, 새로운 사람들로 넘쳐났다.

 




서울에서 13년을 살고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낳고 나는 처음 엄마가 되었다.


우리 엄마는 내 출산 소식을 듣고는 5시간 동안 도로를 달려 나를 보러 왔다. 그리고 예전처럼 나를 꼭 껴안아주었다.

우리 엄마는 내가 기억하는 한 13년 전에도 저렇게 짧은 머리였고, 저렇게 환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똑같았다. 음색이나 목소리 억양도 같았다.

엄마는 13년 전, 그 버스터미널에서 내가 출산한 병원으로 시간을 건너뛰어 온 것 같았다.


버스터미널에서 울었던 우리 엄마는 그때 그 마음으로, 그 표정으로, 계속 거기 서서 여기에 있는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걸 모르고 13년 동안 한 번도 우리 엄마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회사가 바쁘다는 이유로 추석에도 고향에 가지 않았던 적이 많았다. 일 년에 많아야 엄마를 보러 두어 번 버스를 탔을 뿐이었다.

일하다가, 살다가 속이 상할 때마다 전화를 걸어 내 마음을 모두 쏟아내고는 엄마의 마음은 물어보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게 바로 13년 동안 나였다.

그래도 엄마는 엄마가 된 나를 꼭 껴안아주러 13년을 건너서, 나를 만나러 온 것이다.

우리 엄마니까.





내가 낳은 아기는 잠을 자거나 먹거나 칭얼거렸다. 쪽쪽 젖을 빨다가도 꽉 내 가슴을 물었다. 이도 없는데 그게 얼마나 아팠는지 나는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질렀다. 눈물이 질끔 흘렀다.


백일이 지나고, 이백일이 지나고 새벽에 자다가 시시때때로 깨서 큰 소리로 울며 내 잠을 깨웠다. 삼백일이 지나자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해주지 않으면 내 상황은 생각하지 않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밥을 먹었는지, 화장실 가고 싶은데 못 가고 있는 건 아닌지, 잠을 못 잔 건 아닌지, 이런 일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졸리면 울어댔고 배고프다고 칭얼거렸고 가끔은 이유도 없이 찡찡거리며 안아달라고 떼를 썼다. 


아기를 낳고 나는 한동안 우울했다. 집에만 갇혀 지내려니 시간의 개념이 사라졌고 나의 존재감도 희미해졌다. 제왕절개한 수술 자국은 일 년이 지나도록 쑤시고 아팠다.


아기는 자주 잠을 자지 않았고, 힘들게 재우고 나면 쌓여 있는 설거지와 젖병들이 손을 벌려 나를 맞았다.

빨래감과 이유식 만들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남편과 대화할 시간도 줄었고 힘들다보니 다투는 일도 잦았다. 이러다 신경과민증에 걸리는 거 아냐? 이런 걱정이 슬금슬금 나를 두들겼다.


가끔 누군가 내게 물었다.


"아기를 낳은 걸 후회해?"


후회라니, 그럴리가.


어떤 존재가 태어났다. 그 존재 때문에 내가 힘들고 어려워졌지만, 전에 없던 생명이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후회라는 말을 담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의 존재 여부는 나의 후회로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 이 꽃이 피어났는데, 어떻게 이 꽃이 안 피었다면 좋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미 이렇게 활짝 피어서 나를 향해 웃고 있는데.


그 순간 나는 우리 엄마가 떠올랐다.





우리 엄마에게 나는 지금 나의 아기 같은 존재였겠지. 힘들게 하고 속상하게 해도, 여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희망인 존재. 내 자식, 내 딸, 내 아이, 이런 단어들로도 정의 내릴 수 없는 이상한 존재.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 존재. 언제나 지켜주고 싶은 나의 아기.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우리 엄마와 나 사이에 사랑으로도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그 강은 우리 엄마에게는 처음부터 흐르지도 않았다.

우리 엄마에게는 그냥 나라는 강이 흐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우리 엄마는 나라는 강 위에 언제나 발을 담그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13년 전, 버스 터미널에서 우리 엄마는 울었던 거다. 엄마가 살아가던 강이 없어지는 순간에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영영 사라지는 게 아니더라도 엄마에게 그건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을 텐데.


태어난 지 33년이 지나서야 나는 알았다. 우리 엄마 김귀자 씨는 내가 사랑하는 크기를 넘어서, 내 존재 자체를, 나 때문에 이 나라를, 이 지구를, 이 우주를 사랑함을.


지금부터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엄마가 되는 나에게, 엄마가 되는 당신에게 건네는 이야기지만, 나의 엄마에게 건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에게 여전히 엄마라는 단어는 우리 엄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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