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작고 소소한 것에 행복한 나인데!

행복 / 나태주

by 윤이나


행복 / 나태주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나태주 작가의 '행복'도 히어로즈들에게 써 준 편지에 적은 시다. 짧고 간결한 문장이지만 훈훈한 온기가 감돈다. 평화와 행복은 인생 최고의 화두이자 많은 사람들의 목표이지 않을까.


절에 가면 소원을 적어 매달아 놓은 등을 본 적이 있다. 기와에 적은 바람들도 절간 한편을 차지한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남긴 글을 읽다 보면 모두의 바람이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단 하나의 연등도, 기와도 건너뛰지 않는 문장이었다. 삶의 방식은 제각각인데 지향하는 바는 다들 비슷했다.


내가 처음 좋아한 연예인은 배우 박신양이다. 한 번은 그가 어떤 프로그램에 나와서 강의를 하는 것을 보았다. 러시아 유학생활 초창기에 그는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고, 지도 교수에게 "선생님, 나는 왜 이렇게 힘든가요?"라는 이야기를 토로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교수가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철학자의 글을 권했고, 그는 인생이 행복하고 힘들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음에 스스로 놀랐다고 한다. 삶은 행복한 시간만큼 힘든 시기도 많은데 그 순간들까지 모두 사랑해야 결국 나의 인생을 사랑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강연은 끝났다.

나도 내 인생이 마냥 행복할 줄만 알았다. 욕심이 많은 편도 아니고 경쟁을 즐기는 쪽도 못 돼서 목표를 세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적당히 안분지족 하면서 사는 삶이 나였다. 가고 싶은 대학이 있었고, 열심히 노력해 대학 입시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목표하는 직업군이 있어서 공들여 취업도 했다. 워라밸은 만족스러웠고 가족 관계나 교우 관계, 연애 사업도 순조로웠다. 회사 생활이 안정되면서

'와 진짜 감사하다. 행복하다. 더 이상 바랄 게 없네.'

하고 생각했다. 내가 잘났고 최고여서가, 아니라 할 수 있는 최선에서 나름 만족스러운 삶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차곡차곡 혼수 자금을 모아 결혼을 하고, 회사 선배들처럼 아이는 둘 정도 낳아 기르며 육아 휴직도 쓰고, 적당한 때에 퇴직하는 시나리오가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라는 말에 그 김서방처럼 흔하고 평범하게 살아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런 인생이 펼쳐질 줄 알았다. 주위를 둘러봐도 다들 그 정도는 하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기쁨도 잠시. 다시 찾아온 병마와 함께 모든 게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누구보다 평범하게 잘 살고 있다고 자부했던 나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내려놓고 더 잃을 것도 없을 때까지 계속 무언가를 버려야만 했다. 드라마에서만 나오는 불행이 내 이야기가 될 수도 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후 나는 인생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일들에 마음을 열어두기로 했다. '꽃길만 걸으세요'라는 말은 아무래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박신양 배우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인정했다. 내 인생은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불행이 찾아올 수도 있다.


'반드시 행복해야 해.'라는 생각을 버리니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이 세상에 나만 이렇게 힘들고, 어렵고, 불행한 것 같았는데 더 큰 문제를 안고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행복이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있지만 인생의 유일한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거의 집에서 글을 쓰고 책을 읽지만 가끔 날씨가 너무 좋을 때면 책 한 권 들고 카페로 향한다. 가방에는 친구에게 쓸 편지지와 엽서, 필기감이 좋은 볼펜 몇 자루, 토끼가 그려진 앙증맞은 필통, 카드에 붙일 스티커와 스탬프도 담는다. 가장 햇살 좋은 창가에 앉아 구움 과자와 크림 커피를 음미하며 티타임을 갖는다. 혼자서 누리는 최고의 사치이자 꿀맛 같은 시간이다. 기억하고 싶은 예쁜 순간들을 사진에 담았다. 그리고 SNS에 올리며 이런 문구를 덧붙였다.


"이렇게 작고 소소한 것에 행복한 나인데!"


많이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부자를 꿈꿔본 적도 없고 그냥 집 있고, 차 있고, 직장 다니고... 이렇게 말하자 엄마는 "그게 부자"라고 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즈음, 물질적인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충족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모든 게 다 있어도 결국 마음이 공허하다면 행복할리 만무했다. 그리고 모든 걸 다 잃었지만 마음의 동요가 없다면 결코 불행한 삶이라 할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회사원 그다음 스텝을 준비 중이고, 번듯한 집 한 채를 보유하지도 않았으며 아이도 없다. 검진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타는 환자의 삶이지만 든든한 가족과 나를 사랑해 주는 남편,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하며 미래를 꿈꿀 수 있다. 책과 글, 편지 쓸 수 있는 카드와 엽서, 아기자기한 스티커와 도장들, 책갈피 등도 나를 행복하게 하고, 맛있는 음식과 제철마다 아름다운 자연, 훌쩍 떠나는 여행과 안온한 보금자리에도 감사한 마음이다.


역시 행복은 생각하기 나름인가 보다.

행복에 대한 많은 정의와 무수히 많은 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내가 지금 행복한가?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이런 생각에 불현듯 사로잡히는 순간이 온다면, 한 번쯤 이 시를 떠올려도 좋겠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저녁에 돌아갈 집이 있고, 힘들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고, 외로워도 부를 노래가 있다는 사실이 때론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백배의 용기가 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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